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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279) 개원 40주년 맞은 KDI





한국의 대표적인 싱크탱크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달 개원 40주년을 맞았습니다. KDI의 역사는 곧 한국의 경제발전사이기도 합니다. KDI는 대한민국이 세계 최빈국에서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초고속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하는 등 개발의 산파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습니다. 40세, 불혹(不惑)의 나이는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다는 뜻이지요. KDI는 불혹의 시기를 어떻게 넘기고 있을까요. KDI의 과거·현재·미래를 짚어봤습니다.

서경호 기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쓴 KDI 개관 기념 휘호(1972년 7월4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에 위치한 한국개발연구원(KDI) 본관 1층 로비에는 ‘번영을 향한 경제설계’라고 적힌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가 걸려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KDI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KDI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1971년 3월 설립됐다. 처음에 둥지를 튼 곳은 경제기획원 8층의 작은 공간이었다. 그후 서울 서소문동 동아빌딩의 임시 사무실을 거쳐 71년 6월 지금의 홍릉 연구단지 내 본관에 입주했다. 그해 7월 개관식에는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다. 지금 KDI에 걸려 있는 휘호는 박 전 대통령이 그때 쓴 글씨다.

 김정렴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달 10일 KDI 개원 40주년 기념강연에서 각별했던 박 전 대통령의 ‘KDI 사랑’을 소개했다. 김 전 비서실장에 따르면 1960년대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이었던 이희일 전 동력자원부 장관이 당시 김학렬 경제기획원 차관의 동의를 얻어 KDI 설립안을 작성했다. 1962년 첫 발표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전문적인 경제연구소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은 설립기금으로 사재 100만원을 출연하면서 이후 부총리가 된 김 전 차관에게 KDI 설립을 지시했다. 박 대통령은 설립에 필요한 자금은 정부가 지원하되 KDI를 경제기획원 산하가 아니라 인사·자금운용·사업계획을 이사회에서 결정하는 독립 재단법인으로 만들도록 했다.

박 전 대통령은 홍릉 KDI 본관 건물 공사 중에 두 번이나 현장을 시찰할 만큼 관심을 보였다. 최고권력자가 이렇게 애정을 쏟았으니 공사도 빠르게 진행됐다. 기공식 후 석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공사가 끝났다. KDI 본관 정원도 당시 청와대 정원사가 직접 파견돼 조경을 맡았다.




1972년 7월 4일 열린 한국개발연구원(KDI) 본관 개관식에서 박정희(오른쪽 두번째) 전 대통령이 테이프를 커팅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해외에서 11명의 선임 연구원들이 귀국하자 KDI를 몇 차례 방문했다. 71년 초 37세의 김만제 KDI 초대원장이 수행원 한 사람만 데리고 뉴욕으로 떠나 힘들게 모집한 인재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박사가 귀한 시절이었다. KDI 설립 멤버인 구본호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 연구위원(전 울산대 총장, 5대 KDI 원장)도 당시 김 원장의 권유로 귀국했다. 다음은 구 연구위원의 증언. “내가 상대하는 경제기획원을 비롯한 중앙부처 공무원들의 희생적인 근무 자세에 감동을 받았다. 정말 애국자들이다. 당시 공무원은 박봉이었다. 심지어 도시락을 싸오지 못해(1970년대의 공무원들은 대부분 도시락을 가지고 출근했다) 점심시간이면 슬그머니 사무실을 나와 경복궁 쪽을 한 바퀴 돌아오는 것으로 점심식사를 대신하는 공무원도 있었다. 그때 우리 KDI 수석연구원들은 과분한 보수를 받고 있어 이런 공무원들에게 항상 미안했다.”

 KDI 설립 공신인 김만제 초대 원장은 경제기획원 부총리, 재무부 장관 후보로 두 차례나 추천됐지만 1982년까지 내리 11년간이나 원장 자리를 지켰다. 박 전 대통령이 “KDI는 경제기획원 못지않게 중요한 기관이고, 김 원장이 잘하고 있으니 앞으로는 각료 추천 대상에서 빼라”고 지시할 정도로 신뢰를 보냈기 때문이다. 결국 김 원장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 1983년에야 재무부 장관이 됐다.




1982년 전두환 전 대통령(왼쪽)이 KDI를 방문해 기념식수를 하고 있다.

 KDI는 경제정책 훈수만 둔 게 아니었다. 주민등록번호 시스템을 만드는 작업도 주도했다. KDI 초창기 멤버인 김대영 전 건설부 차관(당시 수석연구원)이 남북통일 이후까지 감안해 작품을 내놓았다. 김 전 차관의 증언. “주민등록번호 시스템은 1975년 주민등록제도를 처음 실시할 때 정부 부탁으로 내가 만들었다. 통계학 지식을 활용했고 미국의 사회보장번호(Social Security Number) 시스템을 참고해 만들었다. 주민등록번호 앞쪽 6자리 숫자는 생년월일, 뒤의 7자리 숫자 중 첫 번째 숫자가 남자(1)나 여자(2)를 표시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그 뒤부터는 잘 모르고 있다. 이 뒷부분 7자리 숫자에는 발행자만 알고 검증할 수 있는 비밀 시스템이 들어 있다. 2번부터 5번까지의 4개 숫자는 시·도·군·구 등을 가리키는 지역번호로서 발행 지역이 4자리 숫자로 표시돼 있다. 6번째 숫자는 해당 지역에서 그 번호를 부여하는 순서기호, 그리고 마지막 숫자는 체크 디지트(Check Digit)라고 해서 앞의 6개 숫자 중 어느 하나만 바꾸어도 7개 숫자의 조합이 맞지 않아 위조를 가려낼 수 있는 검증용 숫자다. 주민등록번호는 마지막 숫자로 각자의 번호를 체크해 진위를 가려낼 수 있도록 짜인 통계적 조합 시스템이다. 이 공식에 의해 지역별로 총 1억 명까지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할 수 있다. 남북이 통일된 뒤에도 우리나라 인구가 1억 명을 넘을 가능성은 없으므로 영구적으로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해 나갈 수 있다.”

 KDI는 박 대통령 서거 후 한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80년엔 언론 통폐합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신군부는 정부 출연 연구소의 통폐합을 추진했다. 당시 국보위는 국토개발연구원과 국제경제연구원 등 정부 출연 연구소를 KDI로 흡수·통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시 KDI 부원장을 지낸 김광석 전 경희대 교수는 “공룡처럼 대형화한 연구소에서는 차별화된 연구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통합 압력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결국 통폐합을 막아냈다. 덕분에 KDI가 5공화국 이후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회고했다.

 2011년 현재, 불혹의 나이를 맞은 KDI는 공자님 말씀처럼 세상 일에 미혹됨이 없이 제대로 나아가고 있을까. 요즘 KDI의 가장 큰 고민은 인재 유출이다. KDI가 2013년 세종시로 옮겨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방 이전을 부담스러워 하는 젊은 연구인력이 대학이나 민간연구소 등으로 이직하거나 이직을 고민 중이다. KDI의 한 박사는 “지방으로 가면 그동안 서울에서 탄탄하게 쌓아온 연구 네트워크가 유지될 수 있을지 고민”이라고 했다.

 이렇게 조직이 흔들린 탓일까. 정책연구의 산출물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도 일부 나온다. KDI와의 업무 관련성이 높은 정부 부처의 고위 간부는 “옛날에 비해 참고할 만한 KDI 보고서가 줄었다”고 했다.

 정부와 여론에 휩쓸리지 않고 원칙대로, 연구한 대로 할 말은 하는 ‘KDI 정신’이 다소 후퇴한 것 아니냐는 평가도 KDI 안팎에서 일부 제기되고 있다. 익명을 원한 KDI의 다른 박사는 “KDI 초년병 시절, 선배 박사들로부터 ‘KDI는 정권이나 정부 부처를 위한 연구기관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독립 연구기관’이란 가르침을 숱하게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직 내부의 고민이 많다”고 털어놨다.

 과거엔 어땠을까. 양수길 녹색성장위원회 민간위원장(전 KDI 수석연구원)은 80년대 중반 시장 개방을 주장하다가 곤욕을 치렀다. 농민들에게 소똥 세례를 받았고, 자기 이름이 적힌 지푸라기 인형이 화형식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당시 KDI 연구진들은 일체의 사욕 없이 국가 발전 하나만을 목표로 하얗게 밤을 새워가며 연구에 매진했고, 구체적인 논거에 따라 옳다고 판단한 내용에 대해서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신념이 있었다. 정부의 정책방향과 일치하는 보고서를 내면 ‘정권의 나팔수’로,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을 선보이면 ‘정부와 엇박자 걷는 국책연구소’로 비판받으면서도 항상 떳떳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작은 신념 덕분이었다.”

 양 위원장은 “학자는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KDI 연구진이라면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여타 이해관계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하고, 그것 하나에서만 보람을 찾아야만 한다. 거칠게 말해서 소똥이든 말똥이든 맞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후배들에게 당부했다.

※참고자료: KDI 개원 40주년 기념화보집 『대한민국의 내일을 설계하는 KDI』


KDI 사단

연구원 거쳐간 인사 1000여명
정재계·학계 인재의 저수지


지난 40년간 KDI를 거쳐간 인사는 1000여 명에 달한다. 그 과정에서 KDI는 학계와 경제계·정계 등 사회 곳곳에 인물을 배출하는 인재의 산실 역할을 했다.

고위 공직자로 변신한 인물이 많았다. 정부 정책의 밑그림을 그리고 조언하는 역할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정부 쪽에 몸담는 일이 많았다. 초대 김만제 원장이 경제부총리를 지낸 것을 비롯해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현 무역협회장), 구본영 전 과학기술처 장관, 최광 전 보건복지부 장관, 서상목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대표적이다. 현직 인사들 중에도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KDI를 거쳐갔다.

또 김기환 전 상공부 차관, 박영철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정진승 전 환경부 차관, 이동걸 전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김대영 전 건설부 차관, 양수길 국가경영전략연구원장,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현정택 무역위원회위원장도 KDI 출신이다.

정치권에서는 민주당 강봉균 의원이 제10대 KDI 원장을 지냈고, 한나라당 유승민, 이혜훈, 신지호, 유일호 의원도 KDI가 배출한 국회의원이다. 대학교와 연구기관에서도 250여 명의 KDI 출신들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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