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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도전! 창업 스토리 [2] 박해돈 KGB㈜ 회장




박해돈 KGB㈜ 회장이 경기도 광주시 본사 내 이삿짐 보관창고에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18세 때 이사 일을 시작한 그는 34년간 한 우물을 파 왔다. [변선구 기자]


초등학교 졸업장뿐이지만 ‘이사’만은 1등 할 자신 있었다

38년 전, 경남 밀양 중산리에서 살던 소년은 초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서울행을 결심한다. 5형제 중 셋째인 소년은 부모의 학비 걱정 대화를 듣고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것이다. 단돈 5000원을 쥐고 상경하면서 ‘용의 꼬리가 되느니 닭의 머리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고향 어른의 식당에서 종업원 일을 해 받은 첫 월급은 3000원. 그는 3년 뒤 당시 서울의 변두리였던 강남구 삼성동에 자취방을 마련하고 구두닦이 등을 하면서 ‘1등 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 나선다.

 박해돈(51) KGB㈜ 회장의 청소년 시절 얘기다. KGB는 이사·택배를 비롯해 7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 물류기업으로 지난해 1000억원대 매출을 올렸다. 경기도 광주시 KGB 본사에서 만난 박 회장은 ‘이사의 달인’답게 다부져 보였다.

 “어렸을 때 고생이 심했겠다”는 질문에 박 회장은 “뭘 하든지 고생이라고 생각하면 불만만 쌓인다. 이제껏 고생한다고 여긴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비유를 들었다. “고급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이 장작을 패는 것은 고생스러운 일이지만 산촌에 사는 사람에겐 일상일 뿐이다.”

 그의 이삿일 인연은 17세 때인 1977년 시작됐다. 자취방 근처 이삿짐센터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로 권유받은 게 계기였다. 이듬해엔 중장비 정비사를 꿈꾸며 다니던 직업훈련원을 그만두고 이삿짐센터에 취직했다. 목표가 뚜렷한 만큼 모든 걸 예사롭지 않게 넘겼다. 가구나 소파에 흠집이 나면 원인이 뭔지, 방지책은 뭔지 늘 궁리했다. 사장한테 부탁해 새긴 명함을 들고 시간 날 때마다 영업도 했다.

 그는 5년간의 ‘학습’을 끝내고 83년 잠실에서 창업에 나선다. 주택청약적금을 깨서 마련한 100만원과 친구한테 빌린 100만원 등 200만원이 밑천이었다.

회사 이름은 잠실이사공사. 공기업처럼 책임감 있게 일 하겠다는 뜻에서 ‘공사’를 붙였다.

그는 영업수단으로 신문을 활용했다. 매일 광화문까지 발품을 팔아 스포츠신문을 싸게 구입한 뒤 상호와 전화번호를 새긴 스탬프를 찍어 부동산중개업소에 무료로 돌렸다. 쌀쌀맞게 대하던 중개업소 사장들이 하나 둘 우군이 됐다.

그의 의도대로 어느 집이 언제 이사하는지 정보를 술술 제공해준 것이다. 이사 갈 집 문틈마다 명함을 넣은 편지를 꽂아놓자 주문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사에 서비스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모든 종업원에게 번호를 새긴 유니폼을 입혔다. 고객에겐 ‘웃돈이나 식사 제공 등을 요구하거나 이삿짐에 손상을 입힌 종업원은 번호를 기억했다 신고하라’고 권했다. 대신 종업원에겐 고기반찬 식사를 제공하면서 서비스 정신을 강조했다.

 “친절하다는 입소문이 금방 났죠. 당시엔 전세계약 기간이 1년이라 해마다 이사하는 집이 많아 하루 50건에서 많게는 100건까지 일감을 따냈습니다. 종업원 3명으로 출발했는데 1년도 안 돼 50명이 넘을 정도로 급성장했습니다.”

 박 회장은 86년 포장이사를 국내 첫 소개하면서 사업영역을 서울 전역으로 확대했다. 회사 이름도 한국의 대표 이사업체를 표방하며 ‘고려통운’으로 바꿨다.

상표등록 과정에서 ‘고려’가 국호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몇 년 뒤 ‘고려골든박스’로 상호를 바꾸며 영어 약자 ‘KGB’를 브랜드로 도입했다. 옛 소련의 악명 높은 정보기관 이름과 똑같아 걱정도 했지만 익숙함 때문인지 문제되지 않았단다. 95년엔 프랜차이즈 개념을 도입해 전국 가맹점을 모집하면서 당시만 해도 웬만한 대기업조차 하지 않던 CI(기업 이미지 통합) 작업도 했다.

 그는 사업을 제대로 하려면 ‘고객 만족’이 아니라 ‘고객 리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객 만족은 경쟁사보다 조금만 더 잘해주면 되지만 고객 리드는 새 길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이 고민하고 연구해야 한다. 그래서 항상 ‘내 집 이사를 한다’는 생각으로 궁리한다.”

그는 회사 옆 사택에서 살면서 오전 9시 출근, 자정 이후 퇴근하는 생활을 해오고 있다. 취미를 물으니 서슴없이 ‘일’이라고 했다.

글=차진용 산업선임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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