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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경영] 제 2화 금융은 사람 장사다 ⑩ 농협은행 충무지점 시절





군사정부 “중소기업 대출 늘려라” 명령
돈 안 쓴다는 기업인 쫓아다니며 통사정
군복무 안 한 직원에게 강제휴직 명령 … 첫 직장 떠나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농업은행은 농업협동조합과 통폐합돼 1961년 8월 농업협동조합중앙회로 출범했다. 이때 중소상공인 금융 분야는 중소기업은행으로 분리됐다. 출범 직후 농업협동조합중앙회 본사에 ‘합심하여 이룬 혁명 단결하여 완수하자’ ‘혁명으로 찾은 나라 땀 흘려 재건하자’란 표어가 걸려 있다.





1960년 3월부터 61년 8월까지, 1년반 동안 농업은행에서 일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내가 훗날 금융인으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을 배운 소중한 시간이었다.



 첫 발령을 받은 곳은 지금은 통영으로 이름이 바뀐 경남 충무시에 있는 농업은행 충무지점이었다. 당시 박숙희 농업은행장은 신입 행원인 우리를 전부 농촌 지점으로 내려보냈다. 농업은행 사람은 당연히 국내 농촌 실정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는 변변한 물자가 없던 시절이라 충무는 여수와 함께 밀수가 성행했다. 일본제 나일론 옷감 같은 게 밀수꾼들의 주요 취급 품목이었다. 덕분에 충무는 경기가 괜찮았고 은행 거래도 활발했다.



 스무 명 정도가 근무하는 충무지점에서 일하면서 느낀 것은 월급도 월급이지만 때가 되면 각종 명목으로 지급하는 수당 등으로 대우가 매우 좋았다는 것이다. 사고와 부정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은행원 대우를 잘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은행원은 인기 있는 신랑감이었다. 어느 동네 은행에 대졸 행원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 과년한 딸을 가진 지역 유지들이 예금을 핑계로 찾아와 탐색전을 펼치기도 했다. 우리 지점에도 근방에서 딸 가진 아주머니들이 예금을 한답시고 나를 보러 오기도 했다.



 지점 내에서 학벌로는 최고였지만 상업학교 출신이 아닌 탓에 주산 실력이 4급에도 못 미쳤던 나는 진땀을 뺄 때도 더러 있었다. 주산이라곤 고작해야 신입 연수 시절 한 달 정도 속성으로 배운 게 전부였다. 충무지점에서 처음 맡은 업무는 출납이었다. 매일 업무시간이 끝나면 출납한 돈과 전표가 딱 맞아떨어져야 그날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이를 맞추려면 주판을 써야 하는데 나는 주산에 익숙하지 않아 일을 처리하는 속도가 몹시 느렸다. 그럴 때마다 옆에서 지켜보던 선배들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주판을 빼앗아 대신 처리해 줬다.



 법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생소한 업무 탓에 겪는 이런저런 어려움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농업은행 시절은 재미있는 추억이 더 많았다.



 당시 지점장은 일본 중앙대학을 나온 분이었는데 대졸 행원이라고 나를 크게 배려해 줬다. 1년 만에 보통예금계, 정기예금계, 환·출납, 대출 등 창구 일을 골고루 경험하게 해줬다. 덕분에 짧은 시간에 은행의 일상 업무를 잘 배울 수 있었다. 처음 발령받아 창구에서 돈만 세다가 나왔으면 그런 업무를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때 경험이 금융계에서 생활하는 데 큰 밑천이 됐다.



 리스크 관리라는 게 뭔지를 처음 배운 것도 충무지점에서였다. 충무지점에 부임한 이듬해인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는 중소기업 지원 시책의 하나로 은행들에 중소기업 대출을 지시했다. 중소기업의 자금사정이 어려우니 정부 자금을 각 지점에 배정하고 6월 말까지 대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당시 나는 지점장의 배려로 대출계 일을 배우고 있었는데 한 달여 만에 대출을 쓸 기업을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점장과 함께 지역 기업인들을 쫓아다니며 대출 좀 받아가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괜찮다 싶은 중소기업들은 다들 은행 돈 안 쓴다며 손사래를 쳤다. 돈을 갚을 능력이 되는 기업들엔 대출 수요가 없었던 것이다. 정작 은행에 돈 빌리러 쫓아오는 중소기업들은 돈 갚을 능력이 없었다. 결국 관내의 중소기업을 엄선해 대출 권유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걸 신경쓰지 않고 시키는 대로 아무에게나 돈을 빌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자금 회수가 안 되면 그 책임은 은행이 져야 한다. 그게 바로 리스크이고, 따라서 은행은 기업이나 개인에게 신용도에 맞는 대출을 함으로써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고 관리하는 것이 은행의 중요한 책무라는 것을 그때 배웠다.



 첫 직장인 농업은행 생활은 1년반 만에 막을 내렸다. 5·16 군사 쿠데타로 나라 전체가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몸살을 앓으면서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쳤다. 그때 농업은행이 농업협동조합과 합쳐지게 됐다. 중소 상공인 금융 분야는 따로 떼어져 중소기업은행이 됐다. 직원들도 구조조정을 당했는데 그때까지 군복무를 마치지 않은 직원을 대상으로 강제휴직 명령이 내려졌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첫 직장인 농업은행을 떠나게 됐다.



윤병철 전 우리금융 회장

정리=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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