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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친구로 만드는 매력, 10년간 문단 좌우

조연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의 생전 모습. [중앙포토]
1981년 11월 24일 한국문인협회 조연현 이사장이 해외여행 중 일본 도쿄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해인 80년 회갑을 맞은 조 이사장이 그 기념으로 뒤늦게 아내와 함께 해외여행에 나서 홍콩을 거쳐 일본에 들렀다가 목욕 중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다. 5척 단신에 몸무게가 40㎏(실제 37㎏으로 알려져 있었다)에도 못 미치는 왜소한 체구였지만 평소 건강에 남달리 신경을 써 온 데다 나름대로 꽤 강단이 있다는 평을 듣고 있던 터여서 그의 느닷없는 죽음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문단 전체를 술렁이게 한 것은 그가 70년대 초부터 10년 동안 ‘문단 권력’의 상징으로 군림해 왔기 때문이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7> 조연현의 카리스마

조연현이 한국 문단의 실력자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54년 7월 대한민국 예술원이 창설됐을 때였다. 전체 예술계를 망라한 25명의 초대 회원 가운데 겨우 34세였던 조연현의 이름이 끼어있었다. 다른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문학 분야만 봐도 나이는 물론 문단적 위치나 문학적 업적으로도 그보다 훨씬 앞서는 문인들이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그때까지의 경력을 살펴봐도 이렇다 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20년 경남 함안 태생으로 배재고보를 거쳐 혜화전문(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을 1년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였다.

30년대 후반부터 시와 평론을 쓰면서 몇몇 동인 활동에 참여했던 그가 본격적인 문단 활동에 뛰어든 것은 광복 이후였다. 46년 문단이 좌우로 갈라졌을 때 김동리·서정주 등과 함께 좌익의 문학가동맹에 맞서 청년문학가동맹을 창설하고, 뒤이어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와 한국문학가협회의 창설에도 앞장서게 되는 것이다. 그 무렵 민주일보·민중일보 등 일간지에서 잠깐 동안 사회부장·문화부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그가 초대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것은 선임 과정에서 발휘한 치밀한 전략 때문이었다. 그의 작전에 따라 박종화·김동리·서정주 등 한국문학가협회 주도 세력이 예술원 초대 회원으로 선임됐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최연소 예술원 회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그때 예술원 회원 선임에서 소외됐던 김광섭·모윤숙·백철 등이 한국자유문학자협회를 만들었다).

그 후 조연현은 55년 창간된 ‘현대문학’의 주간으로, 61년에는 동국대 전임교수로, 70년에는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면서 문단에 폭넓은 지지 세력을 형성해 나갈 수 있었다. 김동리가 70년 물러난 박종화의 잔여 임기 1년을 채우고 71년 새 이사장을 뽑는 문인협회 총회가 열렸을 때, 조연현은 김동리 이사장의 대항마로 서정주를 내세웠다. 문단 지지층의 분포로 봐서 충분히 나설 수 있었지만 나이(김동리보다 일곱 살, 서정주보다 다섯 살이 아래였다)로나 문단 경력에서 두 사람에 훨씬 뒤질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문단 선거의 흐름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조연현은 공개적으로 서정주 지지를 선언했으나 개별적인 득표 활동에 나서지는 않았고, 투표 결과 김동리는 여유 있게 서정주를 따돌리고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73년 초 문협의 선거 총회를 앞두고 조연현은 주도면밀한 선거 전략을 마련했다. 우선 서정주와 그의 지지 세력에게서 확실한 지지를 다짐 받는 한편 관계가 소원했던 문단의 지도층 문인들 특히 예술원 초대 회원 선임 과정에서 관계가 악화됐던 옛 자유문협 측 문인들을 찾아가 지난 일에 유감을 표하고 지지를 호소했다. 선거 당일 병석의 김광섭이 휠체어를 타고 입장해 한 표를 던졌던 일은 지금까지도 문단의 전설처럼 남아 있다. 하지만 투표 결과 조연현은 근소한 차이로 김동리에게 뒤졌다. 서정주 계열의 일부가 이탈한 탓이었다. 두 후보자 모두 과반수 득표에 실패해 2차 투표에 들어가야 했으나 조연현은 ‘사퇴하겠다’며 서정주 계열을 압박했다. ‘앞으로 서정주 측과는 어떤 경우에도 뜻을 같이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숨어 있었다. 양측의 물밑 협상 끝에 치러진 2차 투표에서 조연현은 극적으로 역전 당선하기에 이른다.

그 뒤로 문협은 조연현의 독주 체제로 굳어졌다. 물론 이사장의 세 번 연임을 금지하는 규정 때문에 77년 선거에서는 서정주에게 ‘양보’하지만 조연현의 영향력은 이사장 때와 다를 바 없었다. 79년 선거에서 다시 이사장에 복귀한 조연현은 81년 연임함으로써 세상을 떠날 때까지 네 차례에 걸쳐 문협을 장악하게 된다. 조연현 계열은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문인과 동국대 출신 문인이 주축이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문인과 특별한 인간관계를 형성해 그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70년대 막바지의 일이다. 시인이며 출판사 편집장인 이세룡과 신진 여류작가 우선덕이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렀으나 양가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쳤다. 결혼을 강행하기로 결심한 두 사람은 선배 문인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으나 뾰족한 해결책은 없었다. 우선덕의 경희대 재학 시절 은사인 황순원·서정범조차도 ‘부모의 허락을 얻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조연현은 달랐다. 주례를 맡기로 하고 물심양면의 도움을 약속했다.

결혼식 날 두 사람의 후견인 격이었던 나는 조금 일찍 결혼식이 열리는 우이동의 한 호텔로 갔다. 한데 호텔 앞뜰에 마련된 특설예식장은 난장판이 돼 있었다. 웬 청년들이 들이닥쳐 순식간에 모두 때려 부쉈다는 것이다. 신랑 신부는 물론 하객으로 참석한 문인들이 모두 망연자실해 있는데 마침 나타난 조연현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모두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다. 결국 결혼식은 정릉 언덕바지 그의 집 마루에서 치러졌다. 50명이 넘는 문인 하객들은 음식까지 대접받았다. 문학적 업적이야 어떻든, 문단적 공과야 어떻든 문인들과의 그런 인간관계들이 그를 10년 동안 문단의 카리스마로 만드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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