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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이룬 배움의 꿈을 아이들 사랑에 담았지요

아산 신창면에 위치한 신창중학교는 전교생이 250여명에 달하는 작은 시골 학교다. 최근 이곳에서 꾸준히 선행을 펼치고 아이들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할아버지가 있다. 그는 직접 배추를 길러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김치를 만들어주는가 하면 자신이 번 돈으로 장학금을 제공하기도 한다. 3년째 ‘배움터 지킴이’를 하는 박영산(74) 씨의 가슴 어린 사연을 들어봤다.



아산 신창중학교 ‘배움터 지킴이’ 박영산씨







아산 신창중학교에서 배움터 지킴이로 근무하고 있는 박영산씨가 학생들의 손을 잡고 교정을 거닐고 있다. [조영회 기자]







"배고팠던 삶, 배움의 끈만은 놓고 싶지 않았다”



박씨는 1938년 아산 인주면 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자 3남매 중 첫째였던 그는 유년시절부터 학문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다. 배고픈 삶 속에서도 학문을 배워야만 된다는 생각에 온양초등학교를 거쳐 온양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학교와 집까지의 거리는 도보로 1시간 이상이 걸렸다.



 “그때는 전혀 힘든 줄 몰랐어요. 책을 보면서 등하교를 하니까 오히려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 즐거웠죠”



 그런 와중에도 그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장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었다. 중풍으로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와 병수발을 해가며 농사일까지 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장남인 자신이 학문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중풍을 앓고 계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설상가상으로 한국전쟁이 터졌다. 가정형편은 더욱 어려워졌고, 다니던 학교도 휴교에 들어갔다.



 “그때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중풍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홀로 남겨진 어머니, 그리고 어린 동생들에게 내가 아무런 힘이 돼 주질 못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배움의 꿈을 접어야 했던 것도 저에겐 큰 슬픔이었죠.”



내 자식들 만큼은…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낸 박씨는 20살 때부터 철도청 공무원으로 일하게 됐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슬하에 7남매를 두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려 나갔다.



 비록 넉넉지 못한 생활이었지만, 자신이 이루지 못한 학업에 대한 꿈을 자식들이 이어나가길 희망하는 마음으로 학비 등은 아낌없이 지원해줬다. “7남매 모두 대학까지 보냈어요. 매일 같이 생활비는 적자에 시달렸지만 저 대신 배움의 꿈을 펼쳐주는 자식들이 있어 행복할 따름이었습니다.”



 대학을 마친 자식들이 모두 결혼 해 출가를 하자 박씨는 부인과 함께 편안한 노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신은 그마저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건강했던 부인이 암 진단을 받아 40여 일간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것.



 “40일 동안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부인과 이별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의사의 말에 박씨는 망연자실 했다. 이제 겨우 남편으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 했는데…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을 제공했다



결국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부인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고 정확히 42일 지나 세상을 떠났다.



 “너무 마음이 아팠죠. 하지만 계속 실의에 빠져 살면 먼저 떠난 아내가 실망할 것 같았어요. 하늘나라에서 아름다운 집을 짓고 기다리고 있겠다는 아내의 마지막 약속을 가슴에 새기고, 열심히 살아보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다시 일어섰다. 열심히 삶을 살아가다가 먼 훗날 아내를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은 남편으로 거듭나기 위해…



적적함을 잊고자 집 앞 작은 텃밭에 배추를 기르고 동네 주변 길도 손수 나서 깨끗이 청소했다. 그러던 2009년 초 우연히 마을 인근에 있는 신창중학교에 아이들이 등교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아이들의 해맑고 순수한 모습에 자신의 어린시절과 자식들을 키웠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때마침 학교에서는 ‘배움터 지킴이’를 모집하고 있었고 박씨는 이곳에서 근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학교 관계자들도 가뜩이나 지원자가 없어 고심하던 차에 박씨가 배움터 지킴이를 자청하고 나서자 선뜻 받아들였고 그렇게 박씨는 배움터 지킴이 역할을 하게 됐다.



 정진우 교감은 “어르신의 선한 모습에 아이들을 믿고 맡겨도 괜찮다 싶었다”며 “배움터 지킴이는 아이들을 지키는 것뿐 아니라 정을 나눠주는 사람이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어루만지다



박씨는 배움터 지킴이가 된 이후 매일같이 아이들의 등굣길을 청소하고 학교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는 늦은 시간에도 아이들이 안전하게 하교할 수 있도록 주변을 순찰했다. 가끔 집이 먼 아이들은 자신의 승용차로 집까지 데려다 주기도 했다.



 “집이 먼 녀석들이 공부를 마치고 밤늦게 돌아가기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어린시절 생각도 들고 해서 가는 길에 바래다 준 것뿐입니다.”



 박씨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금전적으로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배움터 지킴이를 하면서 번 돈을 장학금으로 학교에 기탁하기로 했다.



 또 자신이 텃밭에서 손수 기른 배추로 김치를 담아 한부모자녀에 나눠주기도 하고 각종 밑반찬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베풀기도 했다.



 학교에서 말썽을 피우는 일명 ‘문제아’들에게는 스스로 뉘우칠 수 있도록 사랑으로 감싸줬다. 이영이 교장은 “지난해 학교에서조차 포기했던 문제 학생을 어르신께서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신 적이 있다. 그 손길이 얼마나 따스했던지 늘 차갑기만 했던 아이가 학교를 떠날 때 눈물을 글썽이며 어르신께 고맙다고 인사를 하더라”라고 말했다.



 이렇듯 수년간 박씨의 선행이 이어지자 학생들도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내복을 선물하는 등 항상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강보연(3년·여) 학생은 “매일 같이 우리를 위해 고생해주시는 할아버지가 우리학교에 있어 자랑스럽다”며 “졸업을 해서도 할아버지의 선행은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학년 장동현 학생도 “1학년 때부터 할아버지를 봐왔지만, 언제나 한결같으셔서 좋다. 겨울이면 학교 곳곳에 빙판을 깨고 가을이면 낙엽을 치워주신다. 어려운 친구들에게는 장학금도 지원해 주시니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에 박씨는 “학교에서 오히려 나 같은 늙은이를 받아줘 고마울 따름”이라며 “난 단지 배움터 지킴이로써 할 일을 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앞으로도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위한 작은 나무그늘이 되고 싶다”고 겸손해 했다.



글=조영민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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