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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수 아닌 영원한 딴따라…복 터져 세계적 뮤지션들 만났죠





데뷔 60주년 첫 전국 투어 콘서트 갖는 윤복희



올해 무대 데뷔 60년을 맞은 윤복희씨. 스스로를 ‘딴따라’로 칭할 만큼 자신감이 넘친다. 다섯 살 때부터 쌓아온 ‘끼’의 자연스런 발현일까. 머리가 희끗한 그가 30일부터 데뷔 이후 첫 전국 투어 콘서트에 나선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하고 싶었던 자리”라고 했다. [강정현 기자]



윤복희는 ‘복희(福姬)’다. 이름 뜻 그대로다. 복이 많은 여자다. 그 스스로 그렇게 말한다. “누군가가 늘 인정을 해주니까 내가 무대에 설 수 있는 거다. 축복 받은 삶이다.” 실제 그렇다. 올해 예순다섯. 그 가운데 60년을 무대에서 살았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환갑 무대’는 종종 있지만 ‘무대 환갑’은 흔한 일이 아니다. 맏언니 격인 패티김(73)도 데뷔 50년을 갓 넘겼다.



 첫 무대는 다섯 살 때다. 뮤지컬 음악가인 아버지(윤부길)의 손에 이끌려 뮤지컬 무대에 섰다. 도쿄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아버지는 귀국하자마자 뮤지컬 악단을 꾸렸다. 국내 최초의 뮤지컬 공연단이었다. ‘부길부길 쇼’라는 타이틀로 전국을 돌며 공연을 펼쳤다. 다섯 살 꼬마 윤복희가 음악으로 기운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주변에 늘 음악이 넘쳐났다. 뮤지컬로 발을 들여놓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음악 인생이 올해로 60년째다. 그는 특별한 ‘무대 환갑’을 준비 중이다. 30일 대전 충남대를 시작으로 청주(5월14일)·부산(5월20일)·대구(6월4일)·서울(일정 협의 중) 등을 도는 전국 투어에 나선다. 그로서는 데뷔 후 첫 단독 투어 콘서트다.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팬들에게 투어 공연을 선물하고 싶었다”고 했다.



 윤복희를 21일 오후 만났다. 서울 마포구 대흥동의 연습실에선 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다. 닫혀진 연습실 문틈으로 ‘여러분’ ‘너무합니다’ 등 익숙한 멜로디가 새어 나왔다.



 # 앞서간 한류 스타



 윤복희는 ‘애어른’이었다. 다섯 살 때부터 성인 배우들과 어울려 공연을 했다. 또래보다 경험의 폭이 넓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곱 살에 어머니를 잃고, 열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래도 꿋꿋했다. 어린 복희는 미 8군 무대 등을 오가며 돈을 벌었고, 충남 공주에 있는 삼촌집에서 지내던 오빠(윤항기)를 뒷바라지 했다.



 버겁게만 흘러가던 그의 삶이 뒤집힌 건 1962년 봄 미국의 재즈 뮤지션 루이 암스트롱을 만나면서다. 방한한 암스트롱 앞에서 그의 모창을 한 게 계기가 됐다. 윤복희의 끼에 주목한 암스트롱은 그를 미국 무대에 설 수 있도록 도와줬다. 열여섯 살 때였다.



 “제가 무슨 복이 많아서 그런 세계적인 뮤지션과 함께 무대에 서고 노래를 하게 됐는지 지금도 잘 믿기지 않아요. 너무나 행복한 순간이었죠.”



 미국 무대에 오르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63년 ‘코리언 키튼즈’라는 4인조 걸그룹을 결성했다. 동남아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필리핀에 여행 왔던 영국인 매니저 찰스 메이더의 눈에 띄게 됐다. 또 한 번의 운명적 만남이었다.









1967년 한국 패션계의 대모 노라 노씨가 디자인한 미니스커트를 입고 포즈를 취한 윤복희씨. “파격적이다” “미쳤다” 등 반응이 엇갈렸다. [중앙포토]



 -영국 BBC ‘투나잇 쇼’에 출연했었죠.



 “1964년이었어요. 비틀스가 막 데뷔했을 때였죠. 쇼에선 치마 저고리를 입고 ‘아리랑’도 부르고, 재즈 노래도 불렀죠. 맨 마지막에 비틀스의 ‘캔트 바이 마이 러브(Can’t Buy My Love)’를 불렀는데, 그게 화제가 됐어요. 다음 날 영국 신문 데일리 메일 1면에 우리 넷과 비틀스 사진이 함께 게재됐죠.”



 요즘의 한류 바람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그는 “조금만 돌아보면 앞 시대에 이미 대단한 음악가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그의 설명.



 “아버지가 뮤지컬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중국어·일본어로도 공연을 했었어요. 6·25 직전이었는데 그때 이미 아시아는 하나의 문화권이었죠. (한류가) 최근 현상만은 아니에요.”



 # 두번의 결혼 실패 … “그 얘기는 그만하죠”



 윤복희는 두 번의 결혼 실패를 겪었다. 첫 남편은 가수 유주용이다. 67년 당시 동양방송(TBC)으로 생중계 되던 공연 중 유주용이 깜짝 약혼식을 제안해 화제가 됐다.



 -TBC와의 인연이 남다르시겠어요.



 “어유, 그때는 죄다 TBC였죠. 제가 나온 필름이 정말 많을 거에요. 추억이 참 많은 방송이죠. 약혼식도 그랬고….”



 두 번째 인연은 가수 남진이다. 그는 인터뷰 전날 방송된 MBC ‘무릎팍 도사’에서 “그분(남진)을 (사랑한 게 아니라) 이용했다”고 말해 인터넷 공간이 들썩였다. 방송 얘기를 슬쩍 꺼내자 그는 “그 얘기는 그만 하자”며 손을 내저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품고 살아간다. “76년 2월 27일 아침 8시에 성령의 은혜를 받았다”고 또렷하게 말할 정도다. 성경 공부를 하던 중 ‘뮤지컬을 계속하라’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의 오빠인 윤항기(예음예술종합신학교 총장)도 키보이스 출신 뮤지션으로 활동하다 목사 안수를 받았다. 윤복희는 기독교에 귀의한 이후 ‘피터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등 굵직한 무대를 이끌며 뮤지컬의 대가로 자리잡았다.



 그는 “가수로 살아본 적이 단 하루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정규 앨범 한 번 낸 적 없고, 가수로 돈을 번 적도 없는데 내가 무슨 가수냐”는 얘기다. 데뷔곡으로 알려져 있는 ‘웃는 얼굴 다정해도’는 “라이브 무대에서 부른 걸 누군가가 LP판으로 녹음해 발매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대표곡인 ‘여러분’ 역시 정식 음반이 아니라 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를 일종의 아이콘으로 떠올리곤 한다. 미국·영국 등에서 활동했던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로, 혹은 1970년대 미니스커트 열풍을 이끈 주인공으로 그를 기억한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나는 딴따라일 뿐”이라고 말한다.



 “올해로 예순다섯이니까 이번 60주년 단독 공연은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요. 내일 죽을지 누가 알아요. 옛날 같으면 고려장(高麗葬) 했을 나이인데…. 그래서 최선을 다할 겁니다. 저를 인정해준 많은 분들께 감사 카드 쓰는 마음으로 무대에 설 거에요.”



 우리 시대의 영원한 딴따라, 윤복희의 ‘무대 환갑’은 그런 간절함으로 차곡차곡 채워지고 있었다. 1588-4446.



글=정강현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사진 이름 소속기관 생년
윤복희
(尹福姬)
[現] 가수 19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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