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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포도청









조선에서 강·절도사건은 주로 포도청에서 다뤘다. 『성종실록』 1년(1470)조에 ‘포도장(捕盜將)’이란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성종 때 이미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만기요람(萬機要覽)』은 포도청에 대해 “도둑과 간악한 소인(姦細)을 잡으며 시간을 나누어 야간 순찰을 맡는다”고 규정했는데, 간악한 소인이란 양반 사대부 이외의 범죄자들을 뜻한다.



 『명종실록』 13년(1558) 8월조는 지경연사 홍섬(洪暹)이 “무뢰배들이 밤중에 여인을 끼고 가다가… 포도청의 군사를 맞닥뜨리면 모두 유사(儒士:사대부)라고 자칭하니 감히 대항하지 못한다”고 말해서 사대부는 포도청의 권한 밖이었음을 말해준다. 범인의 신분은 낮지만 범죄는 중대할 경우 어디에서 처리했을까. 임란 때 풍저창(豊儲倉)의 종 팽석(彭石)이 일본군을 안내해 선릉(宣陵)·정릉(靖陵)을 도굴하게 했다. 『대명률(大明律)』에 따르면 능묘(陵墓) 도굴은 10악(惡) 중 두 번째 모대역(謀大逆)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그래서 선조 26년(1593) 10월 포도대장 이일(李鎰)은 “(팽석은) 중죄인이므로 포도청에서 추국하기가 미안하다”면서 의금부로 이첩했다.



 반면 죄의 종류에 따라 영의정도 수사한 사례가 있다. 숙종 5년(1679) 3월 서인들은 남인 영상 허적(許積)의 아들 허견(許堅)이 서억만의 아내 이차옥을 납치했다고 주장했다. 서인 병조판서 김석주는 “남의 부녀자를 도둑질한 자도 도둑이니 포도청에서 수사해야 한다”고 포도청 관할이라고 내세웠다. 남인들이 의금부를 장악한 반면 포도대장 구일(具鎰)은 서인이었기 때문에 남의 아내 강탈도 절도라는 법리를 내세워 포도청에서 수사하게 했던 것이다. 포도청의 수사 대상이 평민이다 보니 권력 남용 사례가 적지 않아 설립 초기인 성종 21년(1490) 2월 혁파되었다가 두 달 후 복설(復設)되기도 했다. 이때 성종은 “포도대장 등이 죄 없는 사람을 억울하게 구속해 그 폐단이 작지 않기에 폐지했었다”고 말했다.



 국회 사법개혁특위에서 경찰의 수사개시권을 명문화한다는 소식인데, 그간 명문조차 없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수사권 획득이 경찰의 숙원사업인데, 그 당위성은 인정하면서도 많은 국민이 흔쾌하게 동의하지도 않는 상황이다. 아마도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잔영(殘影)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경찰 수사권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를 대폭 끌어올리는 길이 유일한 해법으로 여겨진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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