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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의 시시각각] 민족은 달라도 충성은 하나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도대체 우리가 ‘민족(民族)’이라는 말을 언제부터 썼을까. 20세기 초반에도 한국인에게는 새롭고 낯선 단어였다. 1922년 최록동(崔錄東)이 펴낸 『현대신어석의(現代新語釋義)』는 ‘민족’에 대해 ‘역사적으로 동일한 경로를 거쳐 온 한 집단의 사람들을 말함. 선조가 같고 언어·풍속·관습이 같은 사람을 칭함’이라고 설명해 놓았다(『한국근대신어사전』·한림대 한림과학원). 신어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새로운 개념이었던 것이다. ‘민족’은 미야자키라는 일본인이 1880년대에 프랑스 하원(Assemblee Nationale)을 ‘민족회의’라고 번역한 데서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한국어에는 1890년대에 유입됐다.



 그러나 ‘민족’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땅에서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해 왔다. 진보도 보수도, 남도 북도 예외가 아니다. 망국과 식민지화, 독립, 분단이라는 굴곡진 역사와 궤를 같이했기 때문이다. 사실 보수라면 몰라도 진보·좌파까지 민족 운운하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한국 특유의 풍경이다. 공산주의자의 나라라는 북한이 민족을 떠받드는 것도 일종의 코미디다. 서구, 심지어 일본에서도 ‘민족’을 강조하면 곧바로 극우파 취급을 받는다. 많은 일본 지식인은 ‘국민’이라는 말에도 거부감을 느낀다.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던 좌파 지식인들이 ‘비(非)국민’이라는 구실 하에 모질게 탄압받았던 기억 때문이다. 서양에서 민족주의자(nationalist)는 나치, 즉 국가사회주의자(national-sozialist)를 연상케 한다. 몇 년 전 국내 유명 작가가 독일에 초청받아 가서 문학강연을 했다. 그가 강연 도중 “나는 민족이라는 단어만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저절로 흐릅니다”라고 말한 것을 통역이 그대로 전하자 독일인 청중들은 “웬 극우 나치?” 하는 표정으로 황당해했다고 한다. ‘민족문학작가회의’가 2007년 12월 단체 명칭에서 ‘민족’을 빼고 ‘한국작가회의’로 바꾼 데는 이런 사정도 작용했다. 외국 문인단체와 교류할 때 극우단체로 오해받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민족’의 실체와 효용성이 다 사그라졌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소 추상적이지만 ‘열린 민족주의’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언젠가 닥칠 남북통일을 생각해도 필요한 개념일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나라가 외국·외국인에 개방적일 때는 흥성했고 폐쇄적일 때는 쪼그라들었다는 귀중한 역사적 경험이다. 고려는 귀화인 우대정책을 통해 국력을 키웠다. 광종은 중국계 귀화인들에게 신하들의 집까지 빼앗아 하사할 정도였다. 조선 초기에도 여진족·왜인·위구르인들이 속속 귀화했고, 고려 때 들어온 많은 무슬림도 별 탈 없이 잘 살았다(『우리가 몰랐던 개방의 역사』·안형환). 솔직히 말해 우리가 순수한 단일민족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국방부가 26일 임관하는 군의(軍醫)장교부터 임관선서문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의 ‘민족’ 대신에 ‘국민’을 넣기로 했다. 잘한 일이다. 3월 1일 현재 군복무 중인 다문화가정 출신은 145명뿐이다. 그러나 올해부터 2013년까지 징병검사를 받을 다문화가정 출신 남자(16~18세)는 4000여 명으로 늘어난다. 한창 자라고 있는 7~12세 남자는 1만5000여 명, 6세 이하는 4만여 명을 헤아린다. 이들과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도 우리 국민이요, 우리나라를 위해 국방의무를 질 ‘권리’가 있다. 국내 거주 외국인은 이미 120만 명을 훌쩍 넘겼다. 언제까지 꽉 막힌 민족 타령만 할 것인가.



 사실 ‘살색’을 ‘살구색’으로 바꾸고 임관선서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앞으로 경찰·소방관·교사·교수에서 관료·정치인까지, 다문화가정 출신이 활약하지 않는 분야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들이 ‘민족’을 불문하고 대한민국에 충성할 환경을 만들어 주자. 더 열고 더 많이 받아들이는 것, 그게 우리가 살 길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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