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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명품 거리 ‘뉴욕 5번가’의 굴욕






뉴욕 5번가(5th Avenue)는 미국 귀족(Blue Blood)들의 거리였다. ‘철도 재벌’ 반더빌트와 ‘금융 왕가’ 모건 가문의 동네였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 ‘석유 재벌’ 존 D 록펠러의 사교 무대이기도 했다. 아랫동네 월가에서 돈의 거품이 일면 누보리치(졸부)들이 가장 먼저 진출한 곳이 바로 5번가였다.

 돈·권력이 흐르는 거리답게 그곳에선 현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이벤트가 벌어졌다. 20세기 원년인 1900년에 미 경제패권의 아이콘인 US 스틸이 설립됐다. 주인공은 ‘금융 황제’ JP 모건과 카네기였다. 둘은 부호들의 사교모임인 5번가 유니버스티클럽에서 철강 왕국을 설립했다.





 이후 17년이 흐른 1917년엔 프랑스 최고급 귀금속 브랜드인 까르띠에가 명품 브랜드로선 처음으로 이곳에 가게를 열었다.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른 미국 부호들의 호주머니를 겨냥했다. 이후 구찌·샤넬·티파니·프라다 등이 줄줄이 들어섰다. 명품 브랜드들은 번잡함을 피해 부호들이 떠난 5번가의 새 주인이 됐다. 그들의 입지는 90여 년 동안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명품 회사들 외엔 하늘을 찌를 듯한 5번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요즘 5번가 명품 아성이 흔들리고 있다. 변덕스러운 소비자들의 욕망을 즉각 만족시켜주는 패스트패션이 5번가에 밀려들고 있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들이 ‘저렴한’ 패션들의 거센 도전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스페인 패스트패션의 상징인 자라는 최근 5번가에 추가로 매장을 설치하기로 했다. 지난달 3억2400만 달러(약 3564억원)를 들여 빌딩을 사들였다. 이미 자라는 5번가 중심부에 매장을 두고 있다. 귀족 클럽의 상징이고 모건과 카네기가 US 스틸 설립을 추진한 유니버스티클럽과 마주하고 있는 건물이다. 새로운 세력과 과거 실세가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5번가에서 마주보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의 유니클로는 올가을 5번가에 가게를 낼 예정이다. 건물 임차를 마쳤다. 15년 동안 임차료 3억 달러를 내기로 했다. 매장의 위치는 자라만큼이나 상징적이다. 명품 터줏대감인 까르띠에와 5번가를 두고 마주한다.

 패스트패션의 5번가 진출 물꼬를 처음 튼 브랜드는 스웨덴의 헤네스&모리츠(H&M)다. H&M은 2000년 록펠러센터 옆에 가게를 열었다. 유명한 캐주얼 브랜드인 쥬시꾸띄르의 바로 옆이다. 당시엔 상당한 모험이었다. 닷컴 거품으로 월가엔 돈이 젖과 꿀처럼 흘렀다. 저렴한 패션이 고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이듬해인 2001년 닷컴 거품이 붕괴했다. H&M의 옷은 불티나게 팔렸다. H&M 성공은 미국 젊은이들의 패션을 상징하는 애버크롬비&피치의 5번가 상륙을 불렀다.

 뉴욕 5번가의 높은 임대료는 패스트패션 업체들엔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5번가의 평균 임대료는 올 3월 말 현재 1㎡당 3000만원대”라며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고 최근 보도했다. 5번가 임대료는 2009년 말 이후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금융위기 직후인 당시 평균 임대료는 ㎡당 1600만원 수준이었다. 1년여 만에 두 배 가까이 치솟은 셈이다. 자라와 유니클로 쪽은 “높은 임대료를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만큼 매출을 자신한다”고 밝혔다.

 패스트패션의 5번가 진출은 의미심장한 현상이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거품 붕괴 이후 일본 쇼핑거리엔 대조적인 현상이 나타났다”고 18일 보도했다. 명품과 저가 브랜드의 공존이다. 일본 도쿄의 긴자는 거품시대인 80년대 후반 보수적인 부호들의 무대였다. 주식과 부동산 투자로 주머니가 두둑해진 일본인들이 긴자에서 유럽 명품 사냥에 나섰다. 상황은 거품 붕괴 이후 돌변했다. 거품 붕괴와 함께 자산 가치가 줄어들어 일본인들이 값에 민감해졌다.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기가 부담스러웠다. 소비 욕망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대안으로 싸면서도 세련된 패스트패션과 명품의 조합이 유행했다.

 이런 브랜드의 공존 현상이 마침내 미국에서도 나타났다. 그것도 미 경제패권의 상징이었던 뉴욕 5번가에서 말이다. 거품 붕괴와 금융위기가 계기였다. FT는 “5번가 주변엔 명품 아르마니 재킷에다 패스트패션인 H&M의 셔츠를 걸쳐 입은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고 전했다.

 그런데 요즘 도쿄 긴자는 패스트패션의 천국이다. 명품 브랜드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더 이상 긴자의 주류는 아니다. 패스트패션이 긴자를 사실상 장악했다. 뉴욕 5번가의 앞날도 그럴까.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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