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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 카이, 나를 규정하려 들지 말라

카이(30·본명 정기열)는 어린이 합창단에서 노래를 시작했다. 서울예고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서울대 음대 성악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말끔한 프로필이다. 사람들은 그를 ‘곱게자란’ 음악인으로 본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카이는 독한 음악인이다. 원하는 경지에 오르기 위해 잡았던 밧줄은 여러 번 끊어졌다. 노래하는 목소리를 잃을 것 같았던 적도, 세상에 이름을 알릴 수도 없었던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곤두박질칠 뻔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다시 올라왔다.

이제 서른이고, 경력도 길지 않다. 이달 데뷔앨범 ‘아이 엠 카이(I am Kai)’를 내놓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클래식 음악 쪽 사람들은 대중적이라 하고, 가요계에선 성악가 냄새가난다 한다. ‘팝페라’로 분류하기엔 목소리에 힘이 많이 빠져 있다.






어쩌면 음악계엔 같은 장르의 ‘편’이 별로 없다. 이건 또 하나의 시련이 될 수 있다. 그가 얼마나 이길 수 있을까. 카이는 “나를 어느 쪽에 놓아야 하는지 묻지 말라. 음악을 먼저 들어달라. 언젠가 사람들이 나를 규정하지 않을 때까지 노래하겠다”고 맞선다. 그는 어떻게 이런생각을 가지게 됐을까. 남들 앞에서 노래하기를 좋아하던 소년이 자라 ‘장르’라는 거대한 장벽을 넘어서려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글=김호정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카이는 서울 청담동에 산다. 사람들은 오해한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어요. 청담동의 초라한 지하 방에 식구들과 세 들어 살았거든요. 여름에 에어컨도 못 트는 그 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하룻밤 함께 놀고 나서야 ‘부잣집 도련님’이란 오해를 벗었죠.”

이처럼 그의 기억은 얼마쯤 어둡다.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 반 배정을 받지 못했어요. 학교에 낼 돈이 많이 밀렸거든요. 집에는 말도 못하고 학교 뒤 동산에 올라가서 며칠 동안 새 학기를 보냈어요.”

그는 벼룩시장을 뒤져 일자리를 찾았다. 전단지 500장 돌리고 5만원을 받아 그걸로 레슨비를 냈다. 용돈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서빙을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시작된 가난이었다. 어려서 노래를 시작한 후 첫 고비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시기는 그가 음악을 다시 본 때이기도 하다.

“치열함이 생겼죠. 노래를 정말 계속해야 할까, 왜 불러야 할까를 처음으로 나에게 질문했으니까요.” 서울예고에 입학할 때 그는 성악과 27명 중 25등이었다. 하지만 힘든 상황에서 ‘노래를 그만둘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후엔 달라졌다. 연습에 몰두했다. 생활의 모든 일정을 노래 연습에 맞췄다. 27명 중 1등으로 졸업한 배경이다.






두 번째 고비가 이때 왔다. “성악가에겐 휴식과 여유도 연습의 일부인데, 몰랐던 거죠. 지나친 연습으로 성대에 결절이 생겨 노래를 못할 정도가 됐어요.” 노래를 그만둬야 할까, 질문은 이때 다시 고개를 든다.

“도저히 그만두지 못하겠더라고요. 사람들 앞에서 느껴지는 희열을 놓칠 수가 없었어요. 꼭 노래가 아니더라도 뭔가를 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죠.” 카이는 방송국 아나운서, 탤런트 시험에 도전하면서 ‘끼’를 풀 곳을 찾았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뮤지컬·연극·쇼를 가리지 않고 보러 다녔다고 한다. 풀리지 않는 갈증 때문이었다. 그중 두 가지 공연이 그를 완전히 바꿔놨다. 조영남 디너쇼와 조승우가 나온 뮤지컬 ‘카르멘’이다.

“오랫동안 성악을 했지만 어떻게 하면 깨끗한 소리로 아름답게 낼까만 생각했죠. 그런데 이 두 무대에선 가다듬어진 목소리가 중요하지 않았어요. 전달할 내용이 있는 소리와 음악이 중요했죠. 그리고 사람들에겐 성악가들보다 조영남과 조승우가 훨씬 가깝게 다가가 있잖아요. 그동안 제가 좋은 소리를 만들기 위해 성악적으로 노력했던 게 사실상 본질에서 멀어졌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죠.”

카이는 초창기 시절 조승우의 무대를 보고 집에 돌아가던 중 지하철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키 181㎝인 그는 당시 100㎏이 넘었다. 이후 6개월 동안 35㎏을 감량했다. “무조건 달렸어요. 강남역에서 삼성역까지 매일 뛰었을 정도니까요. 살이 너무 빠지니까 이유를 모르는 어머니는 제가 병에 걸렸나 하고 병원에 데려갔을 정도였어요. 그래도 전 꼭 살을 빼야 했어요. 그런 모습으로 제가 원하는 매력적인 노래를 할 순 없으니까요.” 카이의 말끔한 모습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집념으로 만든 것이다.

데뷔 앨범은 카이가 자신을 버리고 만든 음반이다. 오랫동안 공부했던 벨칸토 창법, 즉 정통 성악 발성을 대중 음악 발성으로 바꾸기 위한 치열한 훈련이 있었다. “마라톤 선수가 100m로 종목을 바꾼 것과 같아요. 언뜻 보기엔 같은 육상 종목이고, 일반인보다 마라톤 선수가 단거리도 더 잘 뛰겠죠. 하지만 선수로서는 훈련체계와 뛰는 방법을 완전히 바꾸는 거죠. 창법 바꾸는 방법을 아는 데 몇 년이 걸렸어요. 아직도 대중가수와 완벽히 같게 부른다고 할 순 없어요.”

그래서 그의 노래는 묘하다. 가요·성악 중 어느 칸에 넣어야 할지 결정하기 쉽지 않다. “사실 외국 가수 중에도 롤 모델을 찾을 수가 없어요. 고민도 많이 했죠. 카테고리 지을 수 없는 음악을 사람들이 좋아할까? 어떤 프로그램에 나가 내 노래를 알려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제 소리를 그대로 가지고 가기로 했어요. 제 목소리는 제 삶과 생각이 그대로 들어있는 결과물이니까요.”

카이는 10여 년 전 생긴 성대 결절을 그대로 안고 노래한다. 매끈한 성대 대신 울퉁불퉁한 소릿길을 거쳐 노래를 끌어올리는 방법을 알았다고 한다. 테너의 미성(美聲)을 어둡고 두꺼운 바리톤 음성으로 바꿨다. 또 힘들었던 어린 시절은 감수성을 선물했다. 카이의 노래에서 느껴지는 특별한 감정은 혼자 이겨내야 했던 시절의 경험이 대부분 만든 것이다. 위태로울 때마다 강해졌던 음악인의 호소다.

“많은 사람이 저에게 물어요. 성악 전공하다 왜 장르를 바꿨느냐고요. 하지만 전 바꾼 게 아니에요. 영역을 넓힌 거죠. 제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저절로 안 하도록 만드는 게 꿈입니다. 저와 제 소리를 세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꿈은 또 있다. 한 보험회사의 CF 모델이 되는 엉뚱한 계획이다. 어둡던 시절, 그를 뒷바라지 하느라 어머니가 다녔던 회사다. 어느 날 갑자기 건강 악화로 쓰러졌던 어머니가 일하던 곳이다. 카이의 행보는 우아한 성악가의 한가로운 전향이 아니다. “내 음악을 규정하지 말아달라”는 말도 단순한 투정이 아니다.

글=김호정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시시콜콜] 카이는 수륙양용
오페라든 뮤지컬이든 다 소화, 조수미가 밀고 노영심과 작업


카이의 시도가 성공한다면 그는 독특한 위치에 서게 된다. 클래식과 대중가요계에 동시에 출연하는 음악인이다.

카이는 현재 KBS 클래식FM에서 진행자로 활약하고 있다. 낮 12시부터 한 시간을 책임지는 ‘생생 클래식’ 디제이다. 정통 클래식 음악을 특유의 낙천적 성격으로 버무려 내 인기가 높다. 공중파 TV의 주말 예능 프로그램 출연도 앞두고 있다. 성남아트센터에서 한 달에 한번 오전 클래식 공연을, 케이블 TV에선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MC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선 바리톤으로,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에선 껄렁한 역할로 출연했다.

함께하는 뮤지션도 두 부류다. 이번 데뷔 앨범에 참여한 테너 김재형은 현재 유럽ㆍ미국 오페라 무대에서 활동하는 성악가다.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김형석ㆍ노영심은 곡을 써줬다. 소프라노 조수미는 예명을 ‘카이’로 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강력한 후원자다. 개그우먼 김미화와 함께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한 경험도 있다. 지난해 서울 예술의전당 유료 객석 점유율 1위를 기록한 유키 구라모토의 크리스마스 공연에 찬조 출연해 진행을 맡았다.

그 과정은 길고 지난하겠지만, 카이는 수륙양용(水陸兩用) 뮤지션을 꿈꾼다. 이제껏 잘 시도되지 않았고, 성공한 경우는 더욱 드물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청중은 새롭고 독특한 뮤지션을 얻게 된다. 카이의 시도를 음악계가 흥미롭게 지켜보는 이유다.

김호정 기자

카이

1981년 서울생

2000년 서울예고 졸업

2007년 서울대 음대 졸업, 석사 거쳐 박사 과정 중

2007년 동아음악콩쿠르 3위

2008년 싱글 앨범 ‘미완’ 발표

2009년 오사카 국제 콩쿠르 3위

2009년 조수미와 전국 투어 공연

2011년 정식 데뷔 앨범 ‘아이 엠 카이’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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