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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칼럼] 대통령의 공약 그리고 헌법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지난 며칠 온 국민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 못지않게 취임 후 선거공약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 실감하고 있다. 대선이나 총선에 나선 후보가 선거 열기 속에서 급한 대로 표심에 맞는 공약을 임기응변으로 남발하는 것은 민주정치의 어쩔 수 없는 허점으로 치부돼 온 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그러한 무책임한 공약의 후유증으로 국가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다면 이번 기회에 정치인의 선거공약에 대한 시민적 인식과 감시 노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할 필요가 있다.

 4·27 재·보선은 2주일 후, 19대 총선은 1년 후, 대통령선거는 내년 12월로 다가왔다. 지금의 국민적 분위기로 보면 확실한 명분과 실천계획을 겸비하지 못한 공약으로 표심을 유혹하려는 후보나 정당은 준엄한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유권자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공약을 제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후보와 정당들은 긴장의 끈을 바짝 죄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동일본 대지진 참사로 방사성물질에 대한 위험에 극도로 민감해진 국민에게 우리의 노후 원전을 과감히 폐기할 것인지, 혹은 새로운 원전으로 대치할 경우의 막대한 비용은 어떻게 창출할 것인지, 독일 녹색당처럼 원전 포기를 주장할 수 없다면 어떻게 ‘원전 안전’을 보장할 것인지 등에 대한 공약은 상당 수준의 기술적 전문성이 필요한 일로 정치인들에게는 집중적 학습이 요구되는 일이다. 미국 버클리대에는 ‘미래의 대통령을 위한 물리학’이란 과목이 있다는데 우리에게도 진작부터 이런 준비가 있어야 했다.

 이왕 선거공약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차제에 헌법 논의와 연관된 가장 핵심적 사안에 대해서도 대통령후보들과 각 정당은 국민에게 분명한 입장을 밝히는 게 바람직하다. 한국 민주주의를 본궤도에 올리려면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데는 광범위한 여론이 조성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정치적 계산에 밀려 헌법 논의는 한 번도 공식화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에도 헌법 개정 절차의 수순을 밟기에는 이미 때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러기에 가장 핵심적 헌법사항인 권력구조에 대해 다음 선거에 임하는 후보와 정당의 분명한 입장과 약속을 선거공약에 포함시킬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싶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기본 규범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권력은 청와대로부터 나온다는 비아냥거림은 수십 년을 이어 왔다. ‘제왕적 대통령제’ ‘대통령 무책임제’ 등이 시정돼야 권력분립의 원칙이 제대로 작동되고 대의정치가 활성화돼 국회와 정당이 본연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는 지적도 줄기차게 제기돼 왔다. 한편 우리처럼 남북 분단과 대결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요동치는 국제적 위기의 물결을 헤쳐 나가려면 강력한 대통령제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갖고 있다. 특히 동일본 대지진 참사를 지켜보면서 강력한 정치 리더십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는 국민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권력집중과 권력분립을 동시에 강조하는 상황에선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모색하는 게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혜일 것이다.

 사실, 그러한 균형과 절충을 위한 노력은 1948년 헌법 제정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돼 왔으며 현행 헌법도 이를 반영하고 있다. 급박한 내외 정세를 감안해 대통령중심제를 기본 틀로 지켜 가면서도 적절한 수준의 권력분립과 대의정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한 방안으로 국무총리제가 유지돼온 것이다. ‘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헌법 제86조는 총리가 행정부와 입법부의 연결고리가 되며 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도록 여지를 마련해 주고 있다.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제87조는 권력분립과 분산을 어느 정도 실현시킬 수 있는 헌법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이 얼마나 유효한지에 대해서는 학문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를 사실상 무효화한 역대 대통령의 관행이 유지돼야 할지 여부는 국민적 선택에 맡겨져야 할 것이다.

 다음 총선과 대선에 임하는 후보와 정당은 헌법에 명기돼 있는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을 충실히 존중하고 따를 것인지, 또는 이를 우회해온 기왕의 관행을 따를 것인지도 확실히 국민에게 공표함으로써 한국적 공약의 정치가 단숨에 업그레이드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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