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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인의 수호신 돌하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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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돌하르방은 본래 읍성의 대문 앞에 세워져 수호신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읍민속마을의 정의현 읍성 동·서·남문의 대문 앞에는 각각 두 쌍의 돌하르방이 있다.

월간중앙 같은 한민족의 대한민국이라도 제주도는 육지와 다른 문화 때문에 정말 귀중하고, 신기하고, 참으로 고맙다. 그것이 전혀 다른 문화라면 신기함에 그치겠지만 유사성이 있는 특색을 지녀서 매우 귀중하다. 낯설지 않되 육지에서 볼 수 없는 개성적인 멋은 결국 우리 문화의 폭을 그만큼 넓혀놓은 셈이라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제주어의 멋
그 대표적인 예가 ‘제주어’다. 조선 팔도에 다 사투리가 남아 있지만 제주도는 사투리가 아니라 제주어라고 불릴 정도로 아주 독특한 한국어를 사용한다. 홍보관 안내원은 육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저 옵서예(어서 오십시오)”부터 열심히 가르쳐주고 육지 사람들은 그것을 재미있게 배워간다. 이처럼 제주어가 재미있는 것은 낱말 자체가 달라서라기보다 어감 때문이다. 육지인은 제주어로 말할 줄은 몰라도 외국어가 아니라 국어의 한 갈래이기 때문에 금방 익힐 수 있고 귀담아들으면 대충 말뜻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러나 본토 사람끼리 본토 발음으로 주고받으면 알아듣기 힘든 게 사투리의 본질이다.

영남대 박물관장 시절 교무회의에 나가보면 회의가 점잖게 진행되다 논쟁이 붙어 열이 오르면 금세 말씨가 표준어에서 경상도 말로 바뀐다. “보이소, 학장! 억하노…” 하고 나오기 시작하면 “뭐라카노…” 하면서 나도 못 알아듣는 얘기가 계속되다 마침내 총장이 “마, 됐다” 하면 끝난다.

이런 현상이 제주도에 이르면 더욱 심하다. 문화재청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제주도 출신 국회의원 세 분은 문광위에 김재윤 의원, 예결위에 강창일·김우남 의원이 있었다. 다행히도 이 세 분과는 일찍부터 교분이 있어 개인적으로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그런데 한번은 예결위에서 강 의원이 제주도의 문화재 관리용 예산 배정이 적다며 청장을 질타했다. 그래서 복잡한 예산 집행 과정을 설명하면서 예산에는 칸막이가 있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를 추진하려고 별도 항목이 책정됐으니 그걸로 이해해달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갑자기 강 의원이 언성을 높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청장님예, 무신거옌 람신디 몰르쿠다.” (청장님요,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강 의원은 나보다도 곁에 있는 기획예산처 장관 들으라고 언성을 높였다. 그래서 현재 예산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문화재청 전체 예산을 더 늘려주면 가능하다고 빙빙 돌려 답변한 뒤 나도 제주도에 애정이 있다는 표시를 하려고 제주어로 말을 맺었다.
“경해도 만히 생각허민 호꼼은 알거우다.” (그래도 가만히 생각하면 조금은 알 겁니다.)

문화유산으로 말하자면 제주 돌하르방은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제주의 아이콘이다. 퉁방울눈에 주먹코, 벙거지 모자를 쓰고 정면정관에 무표정한 얼굴로 두 손은 어울리지 않게 가지런히 모았다. 어찌 보면 무섭고, 또 어찌 보면 귀엽고 천진난만하다. 수호상의 권위가 있으면서 인간미도 있어 의지하고 싶고 친근감이 감돈다. 면면히 흘러온 제주의 민속이 이런 수호상을 만들어냈다니 여간 대단한 일이 아니다.

돌할으방 어디 감수광
하르방은 할아버지의 제주어다. 돌하르방은 육지로 치면 돌장승이다. 지금도 전라도 지방에서는 장승을 할아버지·할머니라고 부르고, 부안 동문안 돌장승, 나주 불회사의 돌장승은 실제로 할아버지·할머니 모습이다. 그러나 육지의 할아버지·할머니 장승은 양식상의 정형이 없음에 비해 제주의 돌하르방은 아주 다양하면서도 일정한 이미지여서 오늘날 제주도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제주어와 돌하르방으로 상징되는 제주문화의 아이덴티티는 제주의 시인 김광협의 <돌할으방 어디 감수광>(태광문화사 1984)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어드레 어떵연 감수광
이레 갔닥 저레 갔닥
아명 아명 여봅써
이디도 기정 저디도 기정
저디도 바당 이디도 바당
바당드레 감수광 어드레 감수광
아무 디도 가지 말앙...
제주섬을 펴줍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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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읍성 서문 터에 세워진 돌하르방은 제주목과 정의현 돌하르방에 비해 크기가 가장 작다.

이 가운데 아래아() 발음은 ‘아’와 ‘오’ 중간음으로 육지에서는 거의 다 사라지고 서부 경남지방에만 약간 남았는데, 제주어에는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제주 어린애들이 ‘ 크래커’를 말하면 육지인에게는 ‘촘 크래카’로 들린다. 이 시를 육지어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돌하르방 어디 가시나요
돌하르방 어디 가시나요
어디로 어째서 가시나요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아무리 아무리 해보세요
여기도 벼랑 저기도 벼랑
저기도 바다 여기도 바다
바다로 가시나요 어디로 가시나요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제주섬을 살펴주세요


오리지널 돌하르방
이처럼 돌하르방은 제주인의 삶 속에 깊이 들어앉아 있다. 그래서 제주도에는 무수히 많은 돌하르방이 있고 지금도 갖가지 크기로 제작되어 정원 조각으로, 식당 여관 대문 앞 지킴이로 세워졌고, 다리의 수호상으로 관광지 이정표로 삼기도 한다. 관광기념품으로 가장 특색 있고 인기 있는 것도 제주도 화산석으로 만든 돌하르방이다.

수많은 돌하르방이 제주도 곳곳에 널려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낱낱의 돌하르방에는 거의 무신경하고 어느 것이 오리지널인지 알기도 힘들다. 또 성읍과 대정에서 약간 다르게 생긴 돌하르방을 보면 그것이 무슨 사연인지 약간 당황스러워하기도 한다. 관광안내원들이 녹음기처럼 들려주는 얘기 중에 서귀포 천지연폭포의 돌하르방이 가장 크고 잘생겼으며 신혼부부가 이 돌하르방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재담이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그런가 보다 하고 각별히 눈길을 주고 전설대로 따라하곤 한다. 그러나 이 돌하르방은 나이가 몇십 년밖에 안 되는 신작이고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돌하르방은 따로 있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민속학적으로 미술사적으로 또 제주의 멋과 고유가치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래서 학생들을 데리고 제주에 오면 그날 저녁엔 나의 돌하르방 이야기가 강의식으로 시작된다.

“제주 어디 가나 보게 되는 돌하르방은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18세기부터 내려오는 오리지널 돌하르방은 모두 47기입니다. 제주목 23기, 대정현 12기, 정의현 12기 등인데 그중 2기는 경복궁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 정원에 옮겨졌고 현재 45기가 남아 있어요.

그중에서 유적지에 남아 있는 것은 제주 관덕정 앞뒤에 4기, 삼성혈 입구에 4기, 성읍 동문·서문·남문 터에 4기씩 모두 12기, 대정읍성 서문 터에 4기 등 24기뿐입니다. 나머지는 제자리를 떠나 지금 제주시청 현관(2기),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2기), 제주대학교(4기), 제주국제공항(2기), KBS제주방송총국 현관(2기), 돌문화공원(옛 목석원, 1기), 대정 인성리회관 앞(2기), 대정 안성리 마을(1기), 대정 보성초등학교(5기) 등으로 흩어져 있답니다. 삼성혈, 관덕정이 제주 답사의 필수 코스인 이유는 거기가 제주 전설의 고향이고, 옛날 제주목사의 관아가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이 제주 돌하르방의 원조가 거기에 있고 또 47기 중 전형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또 가장 잘생겼기 때문입니다.”

내 이야기에 숫자가 나오면 학생들은 본능적으로 메모를 하기 시작한다. 일종의 강의 수법인데 20여 개, 40여 개라고 말해도 그만이지만 그렇게 말하면 긴장감이 떨어진다. 그리고 돌하르방에 구작과 신작이 섞여 있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반도 안 된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면 눈빛이 더 반짝인다. 당구로 치면 ‘히네루’가 제대로 먹힌 것이다.

“돌하르방은 본래 읍성의 대문 앞에 세워진 지킴이였다고 생각됩니다. 조선시대 제주에는 제주목(濟州牧)과 정의현(旌義縣)·대정현(大靜縣), 1주 2현이 설치되었고 각 현마다 읍성이 둘러 있었어요. 그중 정의현 읍성이 가장 잘 남아 있죠. 성읍민속마을이 바로 정의현 읍성입니다. 성읍에는 북쪽에 문이 없고 동·서·남으로만 대문이 나 있었는데 지금도 각 대문 앞에는 각각 두 쌍의 돌하르방이 제자리에 있습니다.
대정읍성은 서쪽 성벽만 일부 남아 있는데 서문 터에 4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게 될 제주 추사관 바로 앞인데 정확히 그 자리는 아니지만 제자리에 있다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어요. 그리고 이 대정현 돌하르방은 제주목·정의현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에 비해 제주성은 거의 다 허물어지고 오현단이 들어선 남쪽에만 약간 남아 있어요. 아주 아쉬운 일이죠.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헐려나가고 도시가 팽창하면서 그 자취마저 거의 없어졌어요. 제주전통문화원의 박경훈 소장의 칼럼을 보면 몇 해 전에 제주성 남문 자리가 발견되었는데 그곳에도 10층짜리 아파트가 들어서버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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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혈에서 태어난 삼신인이 벽랑국에서 온 세 공주를 맞이한 뒤 배필로 삼아 혼례를 올렸다는 혼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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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의 개벽시조인 고을나·양을나·부을나라는 삼신인이 태어난 곳으로 이들이 땅에서 솟아난 구멍이 삼성혈이다.

실제로 제주의 옛 사진을 보면 제주성 대문 입구에 두세 쌍씩 놓여 있던 돌하르방을 볼 수 있어요. 특히 1914년 일제가 토지 측량을 실시할 표본지구로 제주도를 선정하면서 남긴 기록사진이 있는데, 그중 제주성 동문 밖에서 마주 보는 두 쌍의 돌하르방 사진은 정말로 향토색 짙은 옛 제주의 표정이죠.”

이쯤에서 나는 슬라이드나 PPT로 옛 사진을 보여준다. 이 사진을 보는 순간 학생들은 가벼운 탄성을 지르며 “정말 멋있다” “저게 진짜 제주도 풍광 같다”며 자기들끼리 느낀 감정을 나눈다. 그러고는 이내 질문이 들어온다. “언제부터 돌하르방이 저렇게 세워졌어요?” 이렇게 되면 나의 강의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돌장승의 부활
돌하르방이 언제부터 만들어져 세워졌는지 그 역사적 유래를 말해주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1918년에 김석익(金錫翼)이 지은 <탐라기년(耽羅紀年)>에 “영조 30년(1754)에 목사(牧使) 김몽규(金夢奎)가 옹중석(翁仲石)을 성문 밖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옹중석이란 중국 진시황 때 장수인 완옹중 이야기에 나온 고사다. 진나라는 흉노의 침입을 막느라고 만리장성을 쌓을 때 완옹중은 매우 용맹하여 흉노족이 벌벌 떨었다고 한다. 그가 죽자 진시황은 그의 형상을 구리로 만들어 성문 앞에 세워놓았다. 흉노는 완옹중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진나라에 쳐들어왔는데 멀리서 성문 앞에 서 있는 완옹중을 보고 그대로 도망갔다고 한다. 이후 성문 앞에는 수호상으로 옹중석을 세웠다고 한다.

본래 조선시대 문인들은 똑같은 것을 말해도 민간에서는 잘 쓰지 않는 유식한 단어, 특히 중국 고사에 나오는 말을 이끌어 씀으로써 자신의 학식이 높음을 은연중 나타내곤 했다. 단어의 차별로 은근히 자신을 과시하는 현상은 오늘에도 비슷하게 이어져 옛날에 ‘다방’이라고 했으나 ‘커피숍’을 거쳐 요즘은 ‘카페’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결국 그가 말한 옹중석은 지킴이, ‘가짜 인물상’, 제주도 말로 ‘우목석(偊木石)’, 육지로 치면 장승이다.

장승의 유래
장승! 그것은 우리의 전통과 민속에 남아 있는 수호상이다. 솟대에 이루고 싶은 꿈이 서려 있다면 장승엔 현실적인 지킴이의 바람이 있다. 인간사는 반드시 그런 지킴이를 필요로 했다. 삼한시대부터 내려오던 이 장승이 불교가 들어오면서 사천왕·돌사자 같은 도상에 밀려버렸다. 그래도 우리 식 지킴이의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익산의 백제 미륵사 석탑 네 귀퉁이에는 장승의 원형 같은 석상이 세워졌다.

그러다 장승이 부활한 것은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지나가고 국토가 재편되면서 향촌사회에 활력이 일어날 때였다. 이앙법이 개발되어 토지의 생산력이 높아졌고, 고구마 같은 구호작물이 들어오면서 농업이 활성화되었다. 마을에는 협동작업을 하는 두레가 형성되고 농업의 계절적 리듬이 농한기를 지나 본격적인 한 해 농사에 들어갈 대보름이면 한바탕 마을축제가 벌어졌다. 그 축제에는 나무 장승과 솟대를 세웠다. 이를 당산(堂山)이라고 한다. 나뭇단을 태우는 불꽃놀이인 동화제(洞火祭)도 열렸다. 이렇게 어우러진 마을 축제를 동제복합문화(洞祭複合文化)라고 한다.

젊은 시절 나는 이태호 교수와 이 동제복합문화에 심취해 대보름이면 마을굿·장승제·솟대제·동화제가 열리는 곳을 찾아다니고 나중에 공동으로 ‘장승-도전의 힘, 파격의 미’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부활된 장승문화는 조선 후기에 부활하는 사찰문화에도 변화를 일으켜 사찰 입구에 장승이 세워지게 된다. 민중의 마음을 끌기 위해서는 절에서도 장승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사찰장승의 유행으로 나타난다. 육지의 장승들은 대개 나무장승으로 상수리나무나 밤나무를 깎아 세웠다. 지금도 변함없이 계속되는 하남 엄미리 장승, 공주 탄천 장승과 솟대, 부여 무량사 장승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따라서 나무장승은 계속 이어져왔을 뿐 오래된 원형은 없다. 그런데 이때 전라도에서는 돌장승도 유행했다. 붙박이 장승을 세워놓고 거기서 장승제를 지냈다. 그래서 그 원형을 볼 수 있는 것이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1689년에 세웠다는 명문이 있는 부안 서문안 당산이며, 나주 운흥사 장승은 1719년, 남원 실상사 장승은 1725년과 1731년에 세워졌다는 절대 연대를 갖고 있다. 할머니·할아버지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나주 불회사 장승도 대개 이 무렵이라고 생각된다. 이 돌장승들의 공통된 특징은 퉁방울눈에 주먹코이고, 벙거지를 쓰고 두 손은 배에 모았다. 제주의 돌하르방과 똑같은 형상이다. 바로 이 무렵 제주목, 정의현 읍성, 대정현 읍성에 돌장승이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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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시조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으로 제향은 매년 춘기대제와 추기대제를 후손들이 봉향한다.

이런 미술사적·민속학적 맥락을 이해할 때 우리는 돌하르방의 의의와 가치를 확연히 세울 수 있고 이를 더욱 정겹고 의미 있게 바라보며 사랑과 자랑의 감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돌하르방이라는 말의 유래
육지 장승 사진을 곁들이면서 논증하듯 하르방의 유래를 말하다 보면 나 자신도 약간은 상기되어 열강 아닌 열강을 하게 되는데 한숨 돌릴 때쯤에서는 또 반드시 질문이 들어온다.

“그러면 돌하르방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생겼어요?”
“돌하르방이란 말은 근래에 생긴 명칭이에요. 이전에는 고을마다 다양하게 불려 제주도에서도 통일된 명칭이 없었어요. 육지에서도 장승은 벅수·장군·할머니·할아버지라고 지방마다 달리 불렀고 생김도 달랐어요. 제주도 마찬가지였지요. 가서 보면 알겠지만 제주·정의(성읍)·대정의 돌하르방 생김새가 전혀 달라요. 우리가 통상 보는 돌하르방은 제주목의 돌하르방입니다. 대개 우석목·무석목·벅수머리·돌영감·수문장·장군석·옹중석·돌미륵·백하르방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렸다고 해요. 우석목은 제주목에서, 무석목은 대정현과 정의현에서, 벅수머리는 정의현에서만 불렸는데 그중 우석목이 가장 널리 쓰이는 명칭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71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돌하르방이라는 명칭으로 등록한 것이 급속하게 퍼져 아주 오래된 이름처럼 되었어요.

이름이 재미있잖아요. 평생 제주의 민속을 연구하신 김영돈 선생께 들은 이야기인데 당시 문화재위원들이 고민하다 아이들 사이에서 일종의 애칭으로 널리 불리던 돌하르방으로 정했다고 해요.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었지요. 이미 대중적인 검증을 거친 애칭을 붙였기 때문에 우리가 더 친숙하게 부르고 있잖아요. 이제 여러분도 곧 알게 되겠지만 제주는 육지와 달리 민(民)의 생각, 민의 역할이 여러 면에서 잘 반영되어 있답니다.”

약간 보완해 말하자면 돌하르방에 대한 기록은 김석익의 <탐라기년> 외에 1953년에 제주의 민(民)이 펴낸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에도 나온다. 이 문헌은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말살된 민족문화를 되살리고자 광복 직후 도내 석학 12명이 ‘담수계(淡水契)’를 조직해 제주도의 옛 지지(地誌)들을 보완·재정리해 펴낸 책이다. 경제사정이 열악해서 질 낮은 갱지에다 철필로 유지(油紙)를 긁어 프린트한 데다 문장도 문법에 어긋난 곳이 많지만 저자 개인이나 한두 명의 감수자를 두고 편찬된 이전 탐라지들과 달리 광범하고 객관화한 정보를 다뤄 제주사 연구의 핵심자료로 평가된다. 이런 학술사업을 민에서 주도했다는 것이 제주가 이만큼이라도 민속을 지켜온 힘이다. 돌아가신 홍순만 선생이 제주문화원장으로 계실 때 ‘역주’본을 펴냈다.

이 <증보탐라지>에서 돌하르방을 증언하기를 “제주읍성의 동문·서문·남문 등의 3개 문밖에 있었다. 1754년(영조 30)에 목사 김몽규가 세운 것인데, 3문을 헐어 치워버림에 따라 2기는 관덕정 앞, 2기는 삼성동(三姓洞, 삼성혈) 입구로 옮겨 세웠다”고 했다.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돌하르방은 1754년 무렵, 또는 그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덕정과 삼성혈 앞 돌하르방이 중요한 것은 조각 자체가 가장 멋있을 뿐만 아니라 절대 연대 내지 하한 연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나머지 이야기는 현장에서 보완하기로 하고 강의를 끝내면 학생들은 힘찬 박수를 보내고 서둘러 밖으로 밀려나간다. 그 우레 같은 박수가 내 강의에 감사하기보다 강의를 일찍 끝내준 고마움 때문이란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모른 척하고 웃음을 보내준다.

학생들이 다 빠져나간 다음에는 반드시 한 명 아니면 두 명 정도가 뒤늦게 남아 공책을 들이대면서 아까 말한 책 이름을 다시 물어 기록하고 또 강의에서 더 나아간 질문을 하곤 한다. 그 질문 중에는 내가 빼먹은 사항을 꼭 집어 물어오기도 하고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중요한 의문점도 있다. 바로 그럴 때 나는 학생을 통해 새로운 것을 생각하게 되며 그 대답은 현장에서 이어진다.

제주시의 일도, 이도, 삼도
제주 답사의 첫 기착지는 비행기 시각, 숙소 위치에 따라 변동되기도 하지만 삼성혈과 관덕정을 빼놓을 수 없다. 삼성혈은 제주 전설의 고향이고 관덕정은 제주 역사의 상징적 건축이니 이를 찾아가는 것은 제주 답사의 예의라고도 할 수 있다. 삼성혈의 주소는 제주시 이도1동(二徒一洞) 1313번지고, 관덕정은 제주시 삼도2동 43-3번지다.

제주도는 2006년 7월 1일자로 제주특별자치도가 되었다. 그만큼 행정적으로도 독립적 가치가 인정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제주의 행정구역은 제주시와 서귀포시 둘로 나뉜다. 제주시는 4읍, 3면, 19개 행정동으로 개편되고 인구 40만 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제주시의 배후지 역할을 한 한라산 산북지역(山北地域)의 옛 북제주군, 한림읍·애월읍·구좌읍·조천읍·한경면·추자면·우도면 등 4읍 3면을 빼면 인구 30만의 아담한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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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혈 입구의 돌하르방은 키가 234cm로 제주의 모든 돌하르방 중 가장 크다.

행정상 19개 동으로 통폐합하고 도심의 동네엔 1동, 2동 하고 귀를 붙였지만 역시 상가리·하귀리·김녕리·외도리 하고 옛날 식으로 불러야 제주의 맛이 살아난다. 제주의 동네 이름은 그 명칭의 생성과정 자체가 민속이어서 <제주도 마을이름의 종합적 연구>(오창명 지음, 제주대학교출판부, 2007)라는 두 권짜리 책이 나와 있을 정도다. 실제로 생활 속에서는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이 남아 있다.

나에게 제주도를 많이 가르쳐준 제주 민예총의 김상철은 제주 토박이 말씨를 그대로 쓰는데, 한번은 내가 맛있는 귤을 좀 사가고 싶다고 하니까 서문시장으로 데리고 가서는 이것저것 살펴보더니 한 가게에서 잘생긴 귤 하나를 요리조리 매만지면서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삼춘, 이거 남군꺼꽈?” (아주머니, 이것 남제주군에서 온 겁니까?)
귤은 남제주군 것이 달고 맛있다는 얘기다. 제주시에 일도, 이도, 삼도라는 전설과 연결된 동네 이름이 있다니 얼마나 재미있고 정겨운가? 이 동네 이름은 삼성혈을 다녀와야 설명이 된다.

삼성혈
삼성혈(三姓穴, 사적 제134호)은 전설적인 탐라인의 발상지다. 지금부터 4300여 년 전 탐라의 개벽시조인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라는 삼신인(三神人)이 이곳에서 동시에 태어났다. 이들이 땅에서 솟아난 구멍이 삼성혈이다. 이를 모흥혈(毛興穴)이라고도 한다. 움푹 팬 구덩이에 세 개의 혈(구멍)이 품(品)자 모양으로 나 있다. 이 구멍은 비가 와도 빗물이 고이지 않고 눈이 내려도 혈내에 눈이 쌓이지 않는다. 위쪽 구멍은 둘레가 6자고 아래의 두 구멍은 각기 3자인데 그 깊이가 바다와 통한다고 한다.

또한 주위에는 수령 500년 이상의 노송들과 녹나무, 조록나무 등 수십 종의 고목이 울창하게 서 있어 전설적인 분위기를 뒷받침해준다. 그리고 노목들이 모두 신하가 읍(揖)하듯 모두 혈 쪽으로 수그려서 경건함과 신비로움을 동시에 자아낸다. 사실 구멍에 물이 고이지 않는 것은 제주 화산지역의 한 특징이고 나무가 이쪽으로 향하는 것은 식물의 향일성 때문이지만 그것이 삼성혈 전설과 어울리니 그 또한 그럴듯하다.

삼신인은 수렵생활을 하며 살다 지금의 온평리 바닷가에 떠밀려온 나무궤짝 안에서 나온 벽랑국(碧浪國)의 세 공주를 맞이하게 된다. 나무함 속에서는 망아지와 오곡의 씨앗이 나왔다니 이때부터 제주에서는 농경생활이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세 사람은 활을 쏘아 각자 살 곳을 정했다. 그것이 일도, 이도, 삼도의 내력이다.

삼신인과 벽랑국 공주가 결혼하여 낳은 자손이 제주 고씨, 제주 양씨, 제주 부씨다. 세월이 많이 흘러 탐라가 신라 내물왕 18년(373년)에 신라에 입조해 성씨를 하사[賜姓]받을 때 양(良)을 양(梁)으로 고쳤다고 한다.

삼성혈이 성역화된 것은 1526년(중종 21) 제주목사 이수동이 혈 북쪽에 홍문(紅門)과 혈비(穴碑)를 세우고 280여 자의 돌담을 쌓아 고·양·부씨의 후손들에게 혈제(穴祭)를 지내게 하면서 시작되었다. 1698년(숙종 24)에는 이형상 목사가 혈 동쪽에 위패를 모시는 삼을나묘(三乙那廟, 지금의 삼성전)를 세웠고 1772년(영조 48) 양세현 목사 때는 바깥 담장을 축조하고 소나무를 증식하고 제전을 마련하여 건시대제(乾始大祭)를 봉행하였다.

1785년(정조 9)에는 ‘삼성사(三姓祠)’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827년(순조 27)에는 제향을 받드는 전사청(典祀廳)을, 1849년(헌종 15)에는 숭보당(崇報堂)을 세워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사우(祠宇)철폐령으로 위폐가 철회되었다. 그 뒤 재건운동으로 1889년(고종 26)부터 전사청·삼성전 등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제례는 고·양·부 3성의 후손들이 매년 양력 4월 10일에 춘제(春祭), 10월 10일에 추제(秋祭)를 삼성전에서 지내는데 헌관은 3성이 돌아가며 맡는다. 그리고 12월 10일에는 도지사 주재 하에 제주도민이 혈단(穴壇)에서 건시제(乾始祭)를 지낸다.

삼성혈 유적지는 큰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삼성혈을 귀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지금도 변함없이 제를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1754년(영조 30)에 이 앞으로 옮겼다는 돌하르방의 원조가 홍문 앞에 지금도 변함없이 서 있다는 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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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인이 벽랑국의 세 공주를 배필로 정한 뒤 터전을 정도하기 위해 화살을 쏘았는데 그 화살이 꽂혔던 돌멩이를 삼사석이라 한다.

삼성혈 돌하르방
삼성혈 입구의 돌하르방 한 쌍은 진짜 명작이다. 나는 서슴없이 제주 47기의 돌하르방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꼽는다. 키가 234cm로 제주의 모든 돌하르방 중 가장 크다. 굳게 다문 입, 부리부리한 눈, 이마의 주름과 볼의 근육, 그리고 우람한 가슴 근육은 지킴이로서 당당하고 근엄하다. 왼쪽 분은 정면정관에 조금은 인자해 보이지만 오른쪽 분은 고개를 약간 돌리고 노려보는 폼이 제법 무섭다. 그 인체비례와 이목구비는 분명 과장과 변형을 가한 것이지만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그것이 예술이다.

이에 비해 삼성혈 경내에 있는 돌하르방은 정형에서의 이탈을 보여준다. 180cm 정도로 입구의 돌하르방보다 약간 작으면서 어깨춤이 머리 위까지 올라가 등이 굽고 구부정한 모습이다. 그래서 힘이 없어 보인다. 그 대신 무섭지도 않고 사납지도 않다. 그 구부정한 자세 때문에 부담 없는 친숙감이 살아난다. 그것이 예술적 변형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제주의 오리지널 돌하르방은 저마다의 표정과 특징이 있다. 제주목의 돌하르방은 평균 신장이 181.6cm다. 정의현의 돌하르방은 평균 신장이 141.4cm, 대정현의 돌하르방은 136.2cm다. 정의현의 돌하르방은 얼굴이 공처럼 동그랗고 눈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다. 전체적으로 넓적한 느낌을 주며 양손을 배 쪽에 공손히 얹어 단아한 모습이다.

대정의 돌하르방은 키도 작고 몸집도 작다. 다른 지역 돌하르방에 비해 코가 낮고 입이 작고 눈 주위가 움푹하여 소박하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 양손이 가지런히 위아래로 놓였으나 개중에는 두 손을 깍지 낀 것도 있어 주먹을 불끈 쥔 모습이 아니다.

예술을 보는 안목을 기르는 방법은 좋은 작품을 많이 보는 것이 첫째고, 둘째는 비슷한 작품을 면밀히 비교하면서 상대적인 가치를 따져보는 것이다. 그런 시각적 경험이 축적되면 절대평가에서도 어느 정도 소견을 갖게 된다. 제주의 오리지널 돌하르방은 그런 점에서 더없이 좋은 미술사적 안목 배양의 교육장이기도 하다.

혼인지와 삼사석
삼성혈에 딸린 유적으로는 혼인지와 삼사석이 있다. 장소가 멀리 떨어져 있어 답사로 바로 연결은 되지 않지만 그 내력과 현재의 실태만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혼인지(婚姻池, 내비게이션 주소: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1693)는 성산읍 온평리에 있는 800여 평의 연못이다. 벽랑국 공주들이 타고 온 나무상자가 발견된 해안을 황루알이라고 부르는데, 황루알에는 세 공주가 바위에 디딘 발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혼인지 바로 옆에는 삼신인이 혼례를 올린 후 신방을 차렸던 조그만 굴이 있는데, 그 굴은 세 갈래로 되어 있다.

혼인지는 본래 삼성혈처럼 전설이 서린 아담한 연못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유적공원(도기념물 17호)으로 꾸며져 삼공주추원비(三公主追遠碑)에 사당도 세우고 전통혼례식장으로도 사용되면서 전설적인 분위기는 거의 사라졌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유적으로 정비할 생각이었으면 혼인지는 혼인지대로 보존하면서 공원은 딸림시설로 해야 마땅했다. 제주도는 현대에 들어와 돈 들여가면서 이렇게 망가뜨린 유적이 너무도 많다.

이에 비해 삼사석(三射石, 내비게이션 주소:제주시 화북1동 1380-1)은 6차선 큰 길가 화북주공아파트단지 건너편에 있어 전설의 고향 치고는 주변환경이 너무 현대적인 데다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아 학생들을 데리고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삼성혈에서 보면 동쪽 방면에 있다. 제주 해안일주도로인 1132번 도로를 타고 가다 오현고등학교와 화북동주민센터(동사무소)를 지나면 왼편에 있다. 새로 지은 길 이름은 삼사석로지만 눈 크게 뜨고 정신 바짝 차리고 가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그리하여 삼사석 유적지에 도달하면 큰 길가의 한쪽 넓은 돌계단 위로는 한자로 ‘삼사석지’라고 쓴 거대한 유적비가 있어 옳게 찾아온 것이 안심된다. 그러나 이 또한 황당한 현대식 유적비다. 원래의 삼사석은 이 거대한 유적비 옆에 입구도 출구도 없는 넓은 돌담 안에 아주 작은 돌집 하나, 아주 작은 비석 하나가 서 있을 뿐이다. 유적지를 알리는 비가 원 비석보다 암만 안 되어도 열 배는 더 크다.

삼사석은 일명 ‘시사석(矢射石)’이라 하며 이곳 사람들은 ‘살쏜디왓’이라고 부른다. 그때 쏜 화살이 꽂혔던 돌덩이를 보관한 곳이다. 직경 55cm 정도의 현무암으로 영조 11년(1735)에 제주도 사람 양종창이 비각처럼 생긴 돌집을 짓고 보존한 것이다. 높이 1m, 너비 1m, 폭 67cm의 제주도식 돌보호각이 아주 아담하다.

제주도에서는 무엇이든지 돌로 두르는 풍습이 있다. 집에는 돌담, 밭에는 밭담, 무덤에는 산담이 있듯이 비석이고 유물이고 귀중한 것은 돌집에 보존한다. 삼사석 유적지 안을 돌담으로 친 것도 그래서다. 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제주만의 풍광이라 할 수 있다.

삼사석 옆에는 제주목사 김정이 세운 작고 조촐한 비가 서 있다. ‘삼사석비’라는 단정한 해서체 비문 양 옆에는 이를 기리는 비명이 새겨 있다.

모흥혈고(毛興穴古)
시사석류(矢射石留)
신인이적(神人異蹟)
교탄천추(交嘆千秋)

모흥혈의 아득한 옛날
화살 박힌 돌 그대로 남아
삼신인의 기이한 자취
세월이 바뀌어도 오래도록 비추리


그리고 비의 뒷면에는 1930년에 고씨 세 분이 다시 고치고 담장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나는 이 삼사석에 오면 제주도 서정이 물씬 풍기는 조촐하면서도 정성 어린 옛 사람들의 유적지 관리 자세와 무언가 티를 내려고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비석을 세우는 오늘의 자세를 비교하게 된다. 그래서 안목 있는 분들은 입 모아 “제주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다”는 역설을 말하곤 한다.

삼사석의 전설적 유물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것인 듯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주 동쪽 12리에 있다. 고로(古老)들이 말하기를 삼성(三姓)이 터를 정할 때 활을 쏜 바 그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했다. 이리하여 화살이 떨어진 곳이 일도, 이도, 삼도인데 <고려사>에는 “고을나가 사는 곳을 일도(一徒), 양을나가 사는 곳을 이도(二徒), 부을나가 사는 곳을 삼도(三徒)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왜 도자가 무리 도(徒)일까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데 숙종 때 목사를 지낸 이형상이 기록한 제주 박물지 <남환박물>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세 사람이 나누어 살던 곳을 도(徒)라 하였다. …지금 제주성 안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일내, 이내, 삼내’라 한다. 도(徒)는 도(都)자의 잘못인 듯하다. 방언으로 도(徒)는 내(乃)라고 하는데 아마 그 당시 일컫던 말일 것이다.”

이리하여 제주어와 제주민속을 연구하는 분들은 중세국어 표기에서 한자를 빌어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을 분석하여 대체로 일도는 일내, 이도는 이내, 삼도는 삼내로 보며, 여기서 내()는 마을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현용준 선생이 채록한 제주 무가(巫歌)에 이런 사설이 있다.
“일내 일도, 이내 이도, 삼내 삼도리(三徒里), 을(마을) 갈라….”
이처럼 동네 이름 하나를 고증하는 데도 여러 문헌과 여러 학자가 동원되는 것이 제주도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를 추적해가는 것이 여간 흥미롭지 않다. 그래서 제주도에 한번 빠지면 거기서 나오기 힘들다. 제주에 민속학자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며 육지인은 감히 거기에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또 제주인이 아니고는 그 민속의 본질을 체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의 소망 중 하나는 나를 대신하여 제주의 문화유산을 속속들이 밝혀낼 제자 하나를 얻는 것이다.


※다음 호에는 관덕정, 제주목 관아, 동서자복사, 오현단 등으로 이어집니다.

■ 유흥준

유홍준 1949년생. 1993년 펴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전3권)가 통합 200쇄, 판매량 230만 권을 돌파해 ‘인문서 최초의 밀리언셀러’ 작가로 기록됐다.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미술평론으로 당선한 이후 미술평론가로 활동해왔다. 2004년 9월부터 2008년 2월까지 문화재청장을 역임한 후 현재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전3권)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전2권) <화인열전>(전2권) <완당평전>(전3권), 그리고 알기 쉽게 간추린 완당평전 <김정희> 등이 있다.


사진 박상문 월간중앙 사진팀장 [moon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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