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장성민 전 의원 金大中이야기<8>]“DJ가 박정희 추도위 고문? 동생, 이게 어찌된 일인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1994년 6월 평양 대동강변에서 김일성 주석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김 주석은 카터에게 북핵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도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7월 8일 갑자기 사망한다. [중앙포토]
역사를 돌아볼 때 가정(假定)을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건 없다고 한다. 만일 이랬다면, 혹은 저랬다면 하면서 시나리오를 짜봐야 부질없다는 뜻이다. 맞다. 그래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지만 세상사엔 한 개인뿐 아니라 때론 국가의 운명까지 바꿀 결정적 계기가 종종 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그로 인해 모든 게 달라지는 그런 사건들 말이다.

정계 복귀의 터닝포인트

정계은퇴의 쓰라림을 달래며 와신상담(臥薪嘗膽)하던 DJ에게 1994년에 그런 결정적 계기가 찾아왔다. 바로 북핵(北核) 사태와 김일성 주석의 사망이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일 김 주석이 죽지 않고 예정대로 김영삼(YS)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 남북관계는 획기적 변화를 맞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YS는 역사적 회담의 주인공이 됐을 것이고, DJ는 뒤에서 박수나 쳐야 했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도 YS가 됐을지 모른다. 만일 YS가 성공적인 대통령으로 부상했다면 DJ는 영원히 정계에 복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추론을 하다 보면 하릴없이 운명이란 걸 떠올리게 된다. ‘역사의 신’이 도대체 어떤 사건들을 내던져 세상을 어떤 식으로 굴려나갈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94년 북핵 사태가 터지고,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에 가서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남북 정상회담이란 선물을 받아오자 DJ는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했다. 카터에게 방북을 권한 게 자신이기 때문이다.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도 DJ의 판단력과 외교적 역량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국내에선 “역시 DJ가 똑똑하긴 하다”는 여론도 생겨나고 있었다.

카터가 판문점을 통해 귀환한 이틀 뒤인 6월 20일 원불교 종로교단에서 기조강연을 하는 DJ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넘쳤다. 그는 “전쟁 위험이 사라지고 있다. 앞으로 김일성 주석이 미국을 방문할 가능성이 있다. (내가) 카터 방북과 남북 정상회담, 북핵 사태 일괄타결 등을 주장했는데 모두 실현됐다. 정상회담은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가시적인 회담 성과를 기대하진 않는다. 중산층을 겁나게 하는 학생들의 과격시위에 대해 정부는 단호히 충고해야 한다. 그러나 통일 논의는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과격시위 비판은 혹시라도 역풍이 불까봐 그런 것이고, 통일 논의를 개방하라는 건 DJ 본인이 앞으로 이 문제에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런 와중에 갑자기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자 DJ는 더더욱 힘을 얻어갔다. 어쩌면 그는 김일성이 사망한 만큼 통일문제를 주도할 사람은 이제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7월 21일 아태재단 사무실에서 DJ가 지시했다. “내가 3월 말부터 시작한 통일 프로젝트 초고를 8월 말까지 마무리할 방침이에요. 그런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세요. 제목은 ‘남북 공화국연합제 통일방안’인데 초고가 완성되면 공개토론을 거쳐 12월부터 총론과 각론을 차례로 내놓을 것이라고 발표하세요.”

실제로 DJ는 이미 연초부터 재단 연구원과 자문교수진을 총동원해 북한을 연구하고 있었다. 뉴욕주립대에서 북한 에너지문제를 연구한 장영식(장재식 전 의원의 형으로 나중에 한전 사장이 된다) 박사를 부르고, 북한 경제를 전공한 존 곽 박사를 초청해 세미나를 여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정보를 수집했다. 모든 에너지를 북한에 쏟아부은 것이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다. 아태재단 활동이 활성화되는 것과 비례해 자금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DJ는 이 문제도 정치적 방식으로 돌파해냈다. 후원자들을 모집한 것이다.

7월 20일 남산 힐튼호텔에서 재단 후원회 모임이 있었다. 후원회장에는 공화당 출신이지만 명절 때마다 가족들을 데리고 DJ자택에 인사를 왔던 이동진 전 의원이 임명됐다. 상근부회장은 송현섭 전 의원, 부회장은 강수림·김인곤·박은태·안동선·양문희·홍사덕·이경재 의원과 김영도 전 의원이 맡았다. 부회장단에는 비정치인들도 포함됐다. 서울시의원에 당선된 가수 이선희, 야구해설가 김동엽, 연극배우 손숙, 시인 도종환, 소설가 유시춘, 영화감독 이장호씨 등이다. DJ가 정계은퇴를 선언한 2주년인 12월 8일 열린 공식 후원회 행사에선 10만원권짜리 초대권 3000장이 모두 팔렸다. 후원금도 목표액 5억원을 초과 달성했다. 자금 문제는 이런 식으로 해결됐다.

아태재단 후원회는 금전적인 지원만 한 게 아니었다. 후원회장인 이동진 전 의원은 보수진영 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해 10월 박태준 당시 민자당 최고위원이 모친상을 당했다. 이 전 의원은 박 최고위원의 참모를 지낸 적이 있어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DJ는 이 전 의원에게 “조문을 갈 때 아태재단 후원회장 자격으로 가 달라”고 당부했다. 훗날 DJT(김대중-박태준) 연대를 이룰 아주 희미한 밑그림이 이미 그때부터 그려지고 있던 셈이다.

보수세력의 반(反)DJ정서를 희석시킬 또 다른 결정도 있었다. DJ가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위원회 고문직을 맡은 것이다. 94년 10월 26일은 박 전 대통령 서거 15주년이었다. 추도위원장인 신현확 전 총리가 10월 초 연락을 해왔다. 직접은 아니고, 길전식 전 공화당 사무총장을 통해 DJ의 장남 김홍일씨에게 편지를 전달해 왔다. DJ는 고심 끝에 수락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과거에 나를 탄압한 정적이었지만 이제는 다 과거 일이라고 생각하고 고문직을 수락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묘지에서 열릴 추도행사에도 참석하겠다고 했다. 이 보도가 나가자 측근들도 깜짝 놀랐다. 권노갑 최고위원조차 나에게 전화를 걸어 “동생, 이게 어찌된 일인가”하고 물어왔을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김일성 주석의 사망은 DJ가 정계복귀를 하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조성해 냈다. 아태재단도 처음에는 북한 연구에 집중했지만 후원회가 결성되고 다양한 후원자들이 참여하면서 조금씩 정치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게 아태재단의 ‘평화 아카데미’였다. 첫 강좌는 8월 6일 열렸다. 통일문제를 비롯해 아시아의 민주화와 세계 평화를 놓고 연사들이 강연을 했다. 성균관대 장을병 총장, 고려대 강만길 교수, 언론인 박권상씨, 일본 도쿄대 와다 하루키 교수 등 친DJ 지식인들이 연사로 선임됐다. 수강인원은 한 기에 50명이고, 1년에 3기를 배출하는 걸로 돼 있었다. 쉽게 말해 한 해에 150명씩의 ‘DJ학교 사관생도’들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민주당의 실·국장들을 비롯해 95년에 치러질 지방자치 선거에 출마하고픈 정치 지망생이 많이 지원했다. 이들에겐 혹시 지자체 선거 공천 때 도움을 받지 않을까 하는 정치적 동기가 깔려 있었을 것이다. 정치를 떠나 있다고는 해도 민주당에서 그 누구도 DJ의 영향력을 무시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 현장에 있다 보면 기자들의 후각에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속된 말로 냄새를 귀신같이 맡는 것이다. DJ가 정치 재개를 강력하게 암시한 10월 5일 세미나가 그 경우였다. 이날 DJ는 한양대 지방자치연구소와 독일 나우만재단이 공동 주최한 세미나에 참석했다. 취재하러 온 기자들이 물었다. “정치를 다시 하실 겁니까.” DJ는 “내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정작 강연에서 DJ는 여러 가지 의미심장한 주장을 했다. “나는 6대와 7대 국회에서 지방자치제 투쟁의 선봉에 섰다. 5공 청산을 인정하는 대가로 지방자치를 얻어냈고 그걸 실현시키려 단식투쟁까지 했다. 만일 92년 대선에서 법대로 지방자치가 실시됐으면 야당 후보가 더욱 유리한 조건하에서 선거를 치를 수 있었을 것이다. 지방자치는 곧 민주주의와 동의어다.” 이걸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자제는 내가 노력해 이룬 것이다. 둘째, 대선에서 진 것은 지자제가 되지 않아서다. 따라서 억울한 측면이 있다. 셋째, 지자제가 되면 다음 선거는 해볼 만하다. 나는 이 강연을 들으면서 “내년 6월의 지방 선거가 정치에 복귀하는 분수령이 되겠구나.

총재가 복귀 의사를 확실히 굳혔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음 날 중앙일보 4면에는 박보균 기자가 쓴 ‘DJ 행보에 신경 곤두선 與’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갔다. DJ가 갈수록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게 결국 정치 재개 포석으로 보인다는 여권의 우려를 전달하는 기사였다.

DJ는 ‘아시아·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로 94년 한 해를 마무리했다. 12월 1일과 2일, 여의도 63빌딩과 남산 힐튼호텔에서 행사가 열렸다. 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 등 해외 인사도 많이 왔다. 초청장을 보내고 여러 차례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을 통해 부탁했지만 YS는 오지 않았다. 정무수석이나 통일부 장관도 안 왔다. “개인과 사설 연구소가 주관하는 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대신 축사를 보내왔다. “김 이사장은 어둡고 긴 고난의 지난날을 통해 본인과 함께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눈물겨운 투쟁을 해 왔습니다. 나는 그 과거를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김 이사장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지금은 우리 사회의 원로의 한 분으로 평소 자신의 관심사였던 중요한 문제들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투철한 신념이 오늘 이 땅에서 문민정부를 실현시켰다고 믿는 본인은 아태재단의 이번 모임이 성공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당시 아태재단 고문이던 서영훈 전 KBS 이사장이 대독했다. 분위기가 썰렁했다. 명색이 축사인데 내용은 YS의 민주화 투쟁과 문민정부의 중요성을 더 앞세우는 것 같았다. 또 DJ가 정계은퇴를 한 원로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걸 애써 강조하려는 듯했다. DJ 측근들이 술렁거렸다. “이게 무슨 축사여?” 하는 불평이 터져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DJ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대통령 축사에 감사드린다”며 박수를 쳤다. 다들 따라서 박수를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이런 게 정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