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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와 맞선 1만 3000부의 힘, 사람과 세상을 바꾸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보성사 사장 이종일 선생의 동상이 서 있는 수송공원. 동상 너머 공원 가장자리에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 터 표석이 있다. 중동학교가 거쳐갔고 지금은 연합뉴스가 자리를 잡았다. 신동연 기자
“한 장에 한 푼인 신문이오! 읽고 나면 창호지도 되고 밥상 덮는 상보도 되는 신문 한 장에 한 푼이오!” 10대 소년들이 한글로 된 신문뭉치를 겨드랑이에 끼고 서울 거리를 활보하며 외친다. 길거리 가게에서는 신문을 돌려가며 읽던 사람들이 열띤 토론을 벌인다. 철로를 달리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가까이서 울린다. 개화기 서울의 풍경이다. 거의 같은 무렵 기차역이 있는 지방 도시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전까지의 전통 농경사회에서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사회현상이었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 <59> 서울 수송동 대한매일신보사 터

구한말에 등장한 신문은 사회변동을 주도한다. 그 전까지는 일반 국민이 제대로 알 수 없었던 정치·사회 이슈들을 신문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신문 독자들은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도 전국적으로 자연스럽게 공통된 의제를 형성했고 여론을 확산시켜 사회운동을 이끌어냈다. 국채보상운동이나 3·1 만세운동에 신문과 인쇄 미디어의 힘이 작동했음은 물론이다. 공간을 좁힌 철도는 신문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 다수의 독자가 동시에 정보를 공유하는 동시성의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다.

서울 종로 조계사 후문과 연합뉴스 사이 쌈지공원(수송공원)은 바른 말과 곧은 글의 공간이다. 자투리 시간에 들러서 작은 숲을 거닐거나 벤치에 앉아있으면 여러 개의 표석과 기념물들이 이내 말을 걸어온다. 100년 동안 읊조린 이 땅, 이 터의 말씀에 우리는 좀처럼 귀 기울이지 않았다. ‘신문의 날’을 맞아 다시 찾은 이곳에서 정론(正論)을 펼친 선구자들을 떠올린다. 1898년 ‘제국신문’을 창간했던 이종일 선생의 동상이 보인다. 왼손에 신문을 들고 오른손은 불끈 쥐어 들었다. 동상이 선 자리는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했던 보성사(普成社) 터다. 1904년 7월 18일 영국 출신의 언론인 배설(裵說:E.T.Bethell·1872~1909)과 양기탁(1871~1938)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 터는 공원의 서쪽 가장자리다. ‘그런즉 오늘날 일본이 무엇을 믿고 한국을 집어삼키고자 하느뇨. 장창대포를 믿을 뿐이오. 육군해군을 믿을 뿐이로다.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보전한다고 열강국에 성명하면서 한인을 농락하여 누에가 뽕잎을 먹듯 하는 계교를 이루었거니와 지금에 또 동양평화니 한국인민의 행복이니 하는 등 설로 합병을 실행코자 하는가. 오호라 일본아 제국주의의 헛된 영화를 탐내다가 스스로 우환 두통을 사지 말지어다.’ 올곧은 논설은 역사에 묻히고 지금은 표석만 남았다. 1907년 1월 대한매일신보가 시청 앞으로 옮기자 중동학교가 들어왔다. 중동학교는 1984년 강남으로 이사했고 지금은 ‘연합뉴스’가 들어서 있다.

“일본아, 제국주의 헛된 영화 탐내지 말라”
“일제의 탄압이 심했지만 발행인 배설이 가지고 있던 치외법권적 지위를 이용하여 마음껏 필봉을 휘두를 수가 있었어요. 항일 투쟁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던 언론인 양기탁의 소신, 박은식·신채호 선생의 논설도 주효해 당시 신문 가운데 발행부수가 제일 많았고 독자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지요. 국한문판과 한글판, 영문판을 합쳐 1만3000여 부를 발행할 만큼 호응이 컸으니까요. 대한매일신보는 정부가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몰랐던 일반 독자들에게 국가와 사회·세계를 바라보는 창(窓) 같은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독자들의 가치관과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지요. 1910년 8월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하면서 ‘대한’을 떼어내고 ‘매일신보’로 바꿔 총독부 기관지로 만들어 버립니다.”

한국언론사를 전공한 김영희 박사는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창(窓)이었다”고 말한다.
한국사회의 미디어 출현과 수용의 저자 김영희(57·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박사는 “그 때문에 근대적인 매체수용자들의 의식이 더 진보하지 못하고 뒤틀렸다”며 아쉬워했다. 자생적인 근대화의 싹은 그렇게 잘렸다.

당시는 독자투고를 기서(寄書)라고 했는데 학생, 시골선비, 농부, 승려 등 다양한 계층이 기서했다.

“우리 2000만 동포 자매들이여. 깊이 생각할지어다. 생존경쟁하는 시대를 당하여… 이 천한 여자의 생각으로는 결단코 교육이 완전히 성취치 못하여 남의 웃음을 취할까 하노라. …경인철도 제2번 열차로 경성에 도착하여 각처 유명한 연회장과 각 사회와 각 학교를 차례로 심방하여… 국문매일신보를 축호열람하온즉 언론이 공명정대하며 무편무당하여 한국동포로 하여금 독립자유의 감발심을 격동케 하니 나는 하루 밥은 궐할지언정 신문은 궐하지 못하나이다.” 제물포 기생 롱운(18)은 신문 구독으로 자극을 받아 공부를 결심하고 일본으로 유학 가는 사연을 밝히고 있다. 1908년 5월 22, 23, 28일자로 세 번에 걸쳐 게재된 기서내용이다. 당시 신문이 지녔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배설은 한국 언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독립유공자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데일리메일(Daily Mail)’ 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그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고종의 친서를 대한매일신보와 런던트리뷴지에 게재하는 등 항일언론 활동을 벌였다. 일제는 그를 추방하고자 영국 상해고등법원에 제소하였다. 3주간의 금고형, 6개월간의 근신과 벌금형이 내려졌다. 1909년 5월 1일 심장병으로 병사해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양기탁은 기상이 대쪽 같던 언론인이다. 영어와 일어에 능통했던 그는 일찍이 게일 목사가 천로역정을 번역할 때 도왔고 배설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공동으로 창간했다. 일제가 매일신보로 제호를 바꾸고 그를 포섭하려 했지만 사표를 던지고 나와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로써 1910년 8월 28일 지령 1461호로 민족지의 명맥이 끊기고 만다.

일제가 만든 매일신보, 45년 11월까지 발행
일제가 만든 매일신보는 8월 30일 지령 1462호를 시작으로 45년 11월 10일까지 35년간 1만3737호에 이른다. 11월 23일 제호가 ‘서울신문’으로 바뀌지만 지령은 13738호로 이어받는다. 자유당 말기 매일신보의 역사를 도려내고 지령을 역산한다. 98년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꾸고 지령도 재조정했다가 2004년 서울신문으로 재환원하기에 이르렀다. 대한매일신보의 역사성을 계승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95년 발간된 서울신문 50년사에는 해방 이후에 창간된 것으로 규정돼 대한매일신보와의 역사성을 단절한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된 곳, 그 장소성을 계승한 언론사는 ‘연합뉴스’다. 같은 장소에서 80여 년의 시차를 두고 들어선 두 언론사는 상반된 역정을 밟아왔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 당시 치외법권적 자유를 누리다 일제의 제재를 받고 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했다면 연합뉴스는 신군부의 강압적인 언론통폐합과 통신사 통합으로 출발, 점차 자율성을 확보하면서 국가기간뉴스 통신사로 발전해 왔다. 전국의 신문, 방송과 정부부처·기관, 기업체, 인터넷 매체는 물론 해외 계약사에도 뉴스를 공급한다.

“포털사이트나 인터넷신문은 선정적인 제목으로 ‘낚는 기사’를 쏟아냅니다. 인터넷을 통해 연합뉴스가 많이 성장한 것도 사실입니다만 연합뉴스는 인터넷의 선정성과 폭력성을 가장 경계하는 매체이기도 합니다. 국익이 충돌하는 뉴스정보 시장에서는 국가를 대표해 외국 언론사와 경쟁하고 국제정세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국가기간 언론사가 필요합니다. 우리 연합뉴스가 그런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실 대한매일신보가 중심이 됐던 구한말, 우리는 국제정세에 너무 눈이 어두웠습니다.”

이래운(52) 편집국장은 연합뉴스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뉴스의 총본산’이라고 주장한다. 연합뉴스는 현재 신사옥 재건축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100여 년 전 대한매일신보가 자리 잡고 있던 터에 보도채널과 인포맥스(실시간 금융정보 서비스) 등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구축해 대한민국 뉴스허브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대중매체는 우리 삶의 영역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정치적으로는 크고 작은 합의들을 창출하고, 경제적으로는 정보와 광고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발전시킨다. 파편화된 개개인을 하나로 묶는 사회통합기구로 작동하기도, 대중문화의 보급을 통해 의식의 평준화를 낳기도 한다.

24시간 방송과 포털사이트, 소셜네트워크 붐으로 실시간 뉴스검색이 가능해진 오늘날 종이신문들은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다. 신문·방송을 융합해 미디어그룹으로 거듭나려는 몸짓도 있다. 주장이 넘쳐나는 디지털시대에 정보수용자들의 가치판단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독자의 판단력을 강화시키는 심층취재기사와 인문학적 사유가 담긴 명(名)칼럼의 필요성은 과거보다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품격 높은 콘텐트를 읽기 쉽게 편집하는 기능은 종이신문이 지닌 미덕이다. 기사의 중요도를 가늠하면서 종이를 넘겨가며 읽고 사색하는 즐거움은 인류의 오래된 정보수용 방식이다. 종이신문은 당대 지성들이 향유하는 정통 저널리즘의 근간이다.

한 세기 전 개화기를 겪던 이 땅에서 정론을 펼치다 일제에 의해 맥이 잘린 대한매일신보. 그 표석 앞에서 우리 시대의 신문독법을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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