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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조보









시골에 있는 일개 유생(儒生)이 조정의 일들을 속속들이 알고 상소를 올리는 실록 기사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 비결은 바로 ‘조보(朝報)’에 있었다. 승정원에서 전날 일어난 일들을 기록해 매일 반포하는 것이 조보로서 오늘의 신문과 같았다. 저보(邸報), 당보(塘報)라고도 하는데,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말 중에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 적지 않다.



‘분발하라’는 말이 그렇다. 조보가 반포되기 전에 긴급히 대책을 세워야 하는 기사들을 작은 종이에 써서 먼저 회람시킨 것이 분발(分撥)이었다. 일종의 가편집 신문인데, 작은 종이〔小紙〕에 썼으므로 소보(小報)라고도 했다. 각사의 서리(書吏)들이 소지(小紙)에 적은 분발을 전하기 위해 부지런히 뛰었으므로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전용된 것이다.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속담의 기별(寄別)도 조보란 뜻이다. 먹은 것 같지도 않다는 뜻이니 소식을 듣지도 못했다는 뜻이다. “최동학이 기별 보듯 한다”는 속담은 지체는 높지만 무식한 사람을 풍자할 때 쓰는 말이다. 하인이 조보를 가져다 바치면 최동학은 읽는 체하면서 “오늘 조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라고 물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명종 때 문신 임보신(任輔臣)이 쓴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보면 조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기사가 있다. 선비들의 신망을 받던 정광필(鄭光弼)이 김안로(金安老)의 모함을 받아 영남으로 귀양 갔다. 하루는 귀양지로 종이 달려왔는데 발이 부르트고 입이 말라 쓰러져서 말을 못했다. 주머니를 뒤져 보니 김안로가 쫓겨났다는 조보가 있었다는 것이다. 조보에는 일종의 사회면도 있었다. 명재 윤증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지금 조보에 북도(北道: 함경도) 여인이 신의를 지켜 개가하지 않았다는 소식이 실려 있다”는 기사가 있다.



 조보는 역사서란 뜻으로도 쓰였다. 『송사(宋史)』 『왕안석(王安石)열전』에 보면 “왕안석이 『춘추(春秋)』를 ‘조각난 조정 소식(斷爛朝報)’이라고 말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공자가 쓴 역사서 『춘추』를 조보(朝報) 모음이라고 말했다는 뜻인데, 주자학자들은 왕안석이 공자를 낮췄다고 비난했지만 그른 말만은 아니다. 공자는 그만큼 팩트를 중시한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오늘 신문은 내일의 역사서이기에 기자는 곧 역사가다. 넓고 깊은 지식과 비판정신, 그리고 균형감각을 지니고 있어야 독자들이 신뢰한다. 신문의 날에 떠오른 단상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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