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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관사





관사(官舍)를 공무원의 주거용 처소로 좁게 보는 것은 일본식 개념이다. 관사는 관청 자체를 뜻했다. 지방관의 주거 공간은 서헌(書軒)이었다. 정사를 보는 동헌(東軒)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각(西閣)도 같은 뜻이다. 『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산현(慶山縣)조에는 조선 초기 채신보(蔡申保)가 서헌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채신보는 현령 부임 한 달 만에 자식을 잃었다. 자식 잃은 서헌에서 거주하기 싫어 방황하던 중 우연히 동쪽 수풀 우거지고 큰 대나무 있는 곳에 고려 충숙왕 7년(1320) 지었던 서헌을 발견했다. 그는 기둥을 바로 세우고 깨진 기와를 갈아서 서헌 수리를 마친 후 “가족들을 데려다 거처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송(宋)나라 악가(岳珂)가 편찬한 『장일화유(藏一話<8174>)』에는 명필 왕휘지가 ‘하루도 차군(此君: 대나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했다고 전하는데 채신보도 서헌에 큰 대나무가 있는 것을 따서 ‘차군헌(此君軒)’이라고 이름 지었다.

 서헌을 다른 말로 연처(燕處)라고도 한다. 연(燕)자는 제비라는 뜻 외에 편안히 쉰다는 뜻도 있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26장의 ‘수유영관, 연처초연(雖有榮觀, 燕處超然)’에서 나온 말이기도 한데, ‘영화로운 것을 보더라도 편안한 곳에서 초연히 지낸다’는 뜻이다. 퇴근 후에는 세상사에 얽매이지 않고 서헌에서 편안히 쉬고 싶다는 뜻이 연처라는 이름에 담겨 있다.

 반면 『동국여지승람』은 경기도 적성(積城: 파주)의 서헌 이름이 혜민당(惠民黨)이었다고 전한다. 퇴근해서도 백성들을 보살피려는 마음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때로는 국왕도 편히 쉬고 싶을 때가 있었다. 정조는 3미터[丈] 넓이 정도의 작은 움집을 지어놓고 ‘마음을 모으는 움집’이란 뜻에서 회심와(會心窩)라고 이름 지었다. 정사를 살피는 여가에 움집에 향을 피워놓고 마음의 이치를 찾고 마음을 모으는 도(道)를 찾겠다는 뜻이다.

 정조는 『회심와명(會心窩銘)』에서 “여기가 연처이니(于以燕處兮)/내 마음 맑아지네(澄吾心兮)”라고 노래했다. 벼슬아치의 타향 처소를 여저(旅邸)라고도 한다. 나그네가 사는 집이란 뜻이다. 대구(김범일)·대전(염홍철)·울산(박맹우) 시장이 이른바 관사를 없애 세금을 아꼈다는 보도다. 타향에 잠시 머무는 벼슬아치를 위한 것이 여저(旅邸)이니 고향에서 벼슬 사는 사람에게는 필요 없다. 더구나 현존하는 관사 중 상당수는 식민지 시대 일본인 관료를 위한 것이었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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