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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 모를 소리들이 주는 쾌감 아름다움은 결코 정형화될 수 없다

음악을 듣고자 진공관 앰프에 불을 지피면서 동시에 하는 동작이 실내를 어둡게 하는 일이다. 일단 형광등 같은 전체 조명을 끄고 작업실 여기저기에 숨듯이 놓인 백열등이나 양초, 알라딘 램프 따위를 켠다. 그 번거로운 과정을 지켜보는 친구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한다. “웬 무드를 그렇게 잡느냐?”

詩人의 음악 읽기 메레디스 몽크(meredith monk)의 돌멘뮤직(Dolmen Music)

무드를 잡는 것보다는 실제적인 필요 때문이다. 조도가 떨어져야 귀가 예민해져 사운드가 민감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진공관이 달구어지는 데도 꽤 시간이 걸리는데 그사이 여러 개의 부분 조명을 하나하나 줄여나간다. 마지막에는 파란 불꽃 위의 그물망 같은 맨틀이 신비로운 색조로 빛나는 알라딘 오일램프만 남는 경우가 많다. 어둠 속에서 여린 등불과 예민한 음향만이 존재하는 상태. 이제 곧 다른 세상 혹은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다른 곳, 다른 세상, 이곳이 아닌 어떤 곳에 대한 갈망이 컸으나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음악을 출구로 삼아야 했다. 가요를 싫어하고 유행하는 팝송을 되도록 멀리했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그런 노래들은 우리가 사는 ‘지금 이곳’을 너무나 일깨워준다. 그건 아니다. 텔레비전 없이 사는 까닭도 마찬가지다(그러면서 인터넷 뉴스 검색을 얼마나 자주 하는지…).
여기 이곳의 똑같은 대열(방가드)에서 벗어나고자 맨 앞줄, 즉 전위(아방가르드)에 서서 별짓을 하는 부류들이 20세기 전반기에 날뛰었고, 이 문명이 강요하는 이성의 질서를 해체하고 몸의 본능을 찾아나간 20세기 후반기 움직임이 포스트모던이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는 기념으로 김점선이 학교 앞에서 관을 떠메고 나간 것이 아방가르드였고, 전 국토의 모텔화가 구현된 오늘의 한국이 포스트모던…일까?

Dolmen Music 음반 표지.
어두운 작업실 속 알라딘 오일램프의 불꽃 아래서 저 혼자 아방가르드하고 제멋대로 포스트모던하고 제 나름으로 앙데팡당하게 놀 때 반려로서 다가오는 것이 메레디스 몽크의 음반들이다. 위키백과에 몽크의 직업은 작곡가, 무용가, 행위예술가, 감독, 보컬리스트, 영화제작자, 안무가 등으로 길게 나온다. 무어랄까. 음악가로서 만나는 몽크에게 최대의 관심사는 목소리인 듯하다. 첼로나 피아노 등이 간간이 사용되지만 근본적으로 몽크에게 사람의 목소리는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의 수단이 아니라 사운드를 구현하는 악기로서 기능한다. 극한대에 이른 상태에서 내지르는 고음과 저음. 그 목소리는 대개 ‘와와와와’ ‘꺅꺅꺅꺅’ ‘웽웽웽웽’ 하는 소리를 낸다. 돌멘 뮤직(Dolmen Music)이라는 몽크의 음반이 있다. 고인돌 음악이라는 뜻이다. 무덤이되 오랜 시간의 결이 배어 있는 곳. 여섯 명의 남녀 뮤지션이 둘러앉아 나직하고 음산한 첼로 소리로 서곡을 시작하고 점차 ‘와우우’ 하는 혼성합창으로, ‘냥냥냥냥’ ‘꺅꺅꺅꺅’ 따위로 고조되어 가는데 각각 비, 소나무 자장가, 소명, 결미 등의 악장 이름이 붙어 있다.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경험을 말해야겠다. 전위음악을 즐겁게 감상할 사람은 많지 않건만 작업실의 온갖 방문객에게 이 돌멘 뮤직을 들려줘 몰두와 도취에 빠지지 않는 경우를 거의 못 보았다. 무엇보다 우선 아름답기 때문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선율이 영롱한 이슬처럼 빛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메레디스 몽크 퍼포먼스팀이 자아내는 ‘냥냥냥냥 아악아악’ 하는 울음인지 웃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는 맥락이 다른 쾌감을 안겨준다. 아름다움은 결코 정형화될 수 없다는 것이 돌멘뮤직에 대한 청중의 반응으로 증명된다.

돌멘뮤직을 포함한 메레디스 몽크의 음반 대부분이 매우 심각한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 거창한 의미의 무게감으로부터 비켜서 직감적인 느낌과 신체반응으로 유쾌하게 듣는 것이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존 케이지의 그 유명한 ‘4분33초’ 공연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라. 연주자가 4분 33초 동안 완벽하게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다만 음악을 상상하기만 해야 하는 ‘연주’ 동안 다들 심각하기는커녕 장난꾸러기 같은 유쾌한 표정을 짓는다. 이 곡을 ‘지휘’하는 로런스 포스터가 익살맞은 동작과 표정을 짓는 것이 공감된다. 이런 것이 곧 김수영 시인이 표현한 작란(作亂)이 아니겠는가.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는 메레디스 몽크의 음악도 작란의 추구로 들을 수 있다. 어떤 곡은 신비로웠고 또 어떤 음반은 자극적이었는데 시간이 경과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그런 작란이 매우 아름답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안무가답게 소리 속에는 공간이 느껴지고 연극적 설정이 담겨 있다. 하지만 소리의 기괴함이 느낌의 기괴함으로 반응되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최신 음반 타이틀이 덧없음(Impermanence)이다. 아름다움조차 덧없다는 걸까.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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