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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포니’ 신화의 산증인 이충구 현대차 전 사장

‘포니(pony·조랑말)’를 기억하십니까. 1976년생.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 자동차입니다. 1955년 미군 지프를 두드려 만든 ‘시발(始發)차’가 나온 지 20여년 만에 이룬 쾌거였죠. 지금 보면 투박합니다. 그래도 당시엔 ‘이탈리아 종마(種馬)’였습니다. 거장 조르제토 주지아로의 디자인이 스며 있는 ‘조랑말’이 뿌린 씨앗은 이제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이라는 준마로 자랐습니다. 마침 지난달 21일은 포니 주역 중 한 명인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10주기였죠. 가슴속에 ‘포니’와 ‘정 회장’을 누구보다 깊게 묻어 놓은 사람인 이충구(66) 전 현대·기아차 연구개발본부장(사장)을 j가 만났습니다.  



“왕 회장이 ‘힘들지’ 하는데 눈물이 … ”

글=김준술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촌놈들 무모함이 무기가 됐다



●‘이(李) 대리 노트’란 게 유명하다는데.




 “74년 대리 때였다. 어느 날 상사가 말하더라. ‘이탈리아 가야 된다, 준비하라’. 당시 현대차 상호 아래 ‘어셈블러 오브 포드(assembler of Ford)’라고 적혀 있었다. 포드 부품을 조립해 팔던 신세였다. 그러다 고유 모델에 도전키로 했으니 얼마나 감개무량했겠나.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가서 설계며 디자인까지 현지 기술자들이 하는 모든 걸 세 권의 노트에 베끼고 적어 왔다. 직항이 없어 도쿄부터 앵커리지~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이탈리아로 갔다. 포니는 그렇게 탄생했다.”









포니 자동차 탄생에 공헌한 이 대리 노트.







●한솥밥 먹던 포드와 결별한 건가.



 “그렇다. 나중에 알게 된 비화(秘話)인데, 정주영 회장이 크게 한판 붙었다고 하더라. 고유 모델 만들겠다고 했더니 포드 쪽에서 ‘너희가 무슨…’ 하고 깔봤다. 당시 통역을 정세영 회장이 했는데 그에게 호통을 쳤다고 하더라. ‘세게 얘기하는데 포드 애들이 놀라는 기색이 없으니 제대로 하라’고. 아무튼 그렇게 포드와는 끝이 났다.”



●이탈리아행이 두렵진 않았나.



 “사실 신났다. 붕 떴다고 할까. 내가 원래 호기심도 많다. 원래 주지아로가 아우디 디자인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가보니 그야말로 ‘컬처 쇼크’더라. 백지를 놓고 제도(製圖) 책상에서 디자인하던 시절이었다. 처음엔 선 그리는 것만 뚫어져라 봤다. 모눈종이에 선 하나 긋는데 2~3일이 걸리더라. 1년쯤 지나니 차 모양새가 나오는데 ‘아, 이걸 위해 그렇게 했구나’ 생각이 들었다. 도면 종이는 여름·겨울에도 1m당 0.2mm의 오차도 나지 않는 정확한 걸 써야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상사가 ‘돌아와서 해야 될 일은 나더러 다 맡으라’고 하니 책임감이 생기고 꼼꼼히 기록하는 수밖에 없었다. 노트에 적은 걸 숙소 와서 회의하고, 그것도 이탈리아어로 된 걸. 코피도 참 많이 터졌다.”



●설계도만 있다고 차가 나오는 건 아닐 텐데.



 “계속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예컨대 금형은 한국에서 못 떠서 결국 일본에 의뢰했다. 기본 도면만 갖고 1년여 만에 차를 만든 건 무식한 짓이었다. 플랫폼(차체 기본 골격) 없이 고유 모델 한다고 뛰어들었다니, 참. 하지만 그 무모함이란 뿌리가 없었다면 오늘도 없었을 것이다.”











●첫 차가 나왔을 때 심정은 어땠나.



 “어찌어찌 포니 1호 차가 나왔을 땐 솔직히 소감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라인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탈리아에 갔다 왔던 내가 불려갔다. 답을 못 내면 공장이 계속 서 있는 거다. 당시 첫 아이는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얼굴을 봤다. 이후 서울에서 1호차 시승할 때도 정신이 없어서 현장에 가보지도 못했다. 남산을 올라가는데 ‘문제 없이 잘 오르더라’는 말을 듣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요즘 국산차를 보면 감회가 새롭겠다.



 “이(李) 대리 노트의 초기 부분을 보면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게 많다. 심지어 도면이 움직이지 않게 누르는 쇳덩이가 있는데 3.5㎏짜리를 쓰더라.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이것도 똑같이 만들었다. 촌놈들이 처음 보는 걸 무작정 베껴온 것이다. 그런 시절을 겪고, 오늘 여기까지 도약했다. 1998년에 내가 ‘시카고 선언’이란 걸 했다. 모터쇼 가서 직원들 100여 명 모아놓고 얘기했다. ‘이제 우리가 미국의 빅3(GM·포드·크라이슬러)는 추월했다’고.”



●일본과 유럽 차가 있잖은가.



 “맞다. 미쓰비시는 추월했지만 닛산·도요타·혼다는 여전히 형님이다. 그 위엔 독일 애들이 있다. 일본도 겁내는 나라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나라가 부러워하는 의사결정 체계가 있다. 일본의 차 회사가 11개다. 자유경쟁을 통한 흡수합병이 이뤄지지 않는다. 폐쇄적이란 소리와 같다. 물론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86년 미국 시장에 처음 들어갈 때 워싱턴타임스 기자가 이렇게 썼다. ‘현대차는 아직 차(車)가 뭔지 모른다’고.”



재수하려다 유턴, 인생이 바뀌었다



●자동차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어떻게 인생 승부수를 던졌나.




 “63년 경기고 졸업 뒤 서울대 공대 공업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실은 2지망이었다. 원래 전기전자 쪽을 가고 싶었는데 1점 차로 떨어졌다. 재수한다고 그때 최고였던 양영학원 1개월 다니다가 공업교육학과가 여러 전공으로 나뉜다는 얘길 들었다. 자동차도 있다고 하기에, 어 그건 재미있겠다 하고 다녔다.”



●차에 대한 미학적 안목은 어떻게 키웠나.



 “설계며 디자인, 이런 것에 소질이나 취미가 있던 건 아니다. 다만 대학교 때 아마추어 사진가 소릴 들을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4년간 카메라 메고 등교했다. 66년인가, 대학생 사진대회가 처음 열렸는데 출품을 했다. 장려상과 입선으로 2개가 붙었다. 여러 대학 학생을 모아 연합 동호회를 만들어 회장도 했다.”



●사진은 어려서부터 좋아했나.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지금 미국에 있는 누이가 ‘1등 했으니 선물 사준다’기에 카메라를 얘기했다. 리코 플렉스라는 제품이었다. 현대차에 입사해선 시간이 없어 잘 못 찍다가, 6~7년 전쯤 사장 관두고 문화센터 가서 다시 배웠다. 누드를 찍고 싶어 강의도 듣고, 하하.”



●원래 한 우물을 끊임없이 파는 스타일인가 보다.



 “그보다는 뭔가 배우고 싶은 게 많은 성격이다. 사진 관두고선 한동안 기(氣) 수련에 매달렸다. 등산도 즐기는데, 안나푸르나에 두 번 갔다 왔다.”



●대학에선 뭘 배웠나.



 “사실 여건이 열악했다. 미국 대외원조단체(USOM)가 제공한 자동변속기로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지게차 한 대가 학습용으로 왔다. 분해조립을 하니 볼트와 너트가 한참 남더라, 하하.”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겠다.



 “69년 입사하고, 포드의 코티나 같은 차들을 하루 6대 만들까 말까 하던 시기였다. 남의 부품 갖고 볼트와 너트 조립하는 수준이었다. 품질관리 부서에 들어가 생산된 차를 검사하고, 제작 과정의 노하우를 맨땅에서 익혀 나갔다.”



●그에 비해 요즘의 한국 기술자 수준을 평가하면.



 “예컨대 디자인을 보자. 스텔라와 쏘나타 초기 모델까진 외국 힘을 많이 빌렸다. 주지아로 작품들이 그랬고. 그런데 일본말로 ‘쿠세(くせ, 습관·버릇)’라고 하는 쏠림이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 산업 특유의 원색을 좋아하고. 나중엔 질리더라. 그 뒤론 일본과 미국 디자이너들에게서도 디자인을 받았다. 그러면서 한국 개발자가 많이 배웠다. 아까 말한 것처럼 일본과 유럽 메이커는 여전히 따라잡을 대상이다.”



●기술·디자인이 발전했다지만 아직도 외국 손을 많이 빌리지 않나. 기아차도 피터 슈라이어가 온 뒤에야 차별화에 성공했다는 평가인데.



 “그것도 90% 이상은 국내 개발자들이 이뤄놓은 것이라고 본다. 사실 우리가 고민했던 게 뭐냐 하면 ‘패밀리 룩’이다. BMW는 차 앞부분의 ‘키드니 그릴’이 차종마다 일관된 모습을 갖고 있다. 우린 아무리 해도 이게 잘 안 나오더라. 뭔가 디자인이 나와도 그걸 인정을 안 해 주더라. 그래서 유럽 디자이너들을 데려와 쓴 거다. 그쪽의 가치를 이식했다고 할까.”



●디자인 말고도 다른 기술이 어우러져 차가 나온다. 한국의 경쟁력을 집약해 말한다면.



 “짧은 기간 동안 쌓은 연구개발(R&D) 경험이다. 내가 34년 일하는 동안 승용차 신모델만 35종을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노하우와 인적 자본의 경험, 결국 사람이 경쟁력으로 자랐다. ”



●본인 스스로도 제자들을 키우는 데 열심이다. 강의도 많이 했는데.



 “서울대에서 2년, 국민대에서 4년 강의했다. 공대생들이 꿈을 가져야 한다. 나중에 사장 돼보니 재경(財經) 부문도 별것 아니더라. 공대생이 돈 만지고 이런 사람들에 비해 최고경영자(CEO)가 안 될 법도 없다. 인생·직장·현장 이런 얘기를 많이 해줬다. 책에 있는 건 모르고. 그건 교수들이 하는 거다, 하하. 지금은 서울대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에서 특임연구위원으로 있다.”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게 뭔가.



 “좀 전에 말했지만 꿈이 중요하다. 다음엔 실무적으로 외국어 하나는 ‘끝장을 보라’고 말한다. 또 내가 강의한 학생들에겐 ‘비전 2020’이란 걸 만들 게 했다. 몇십 년 뒤 자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놓고 도전해 보라는 거다. 나는 지금도 비서를 뽑으면 꼭 비전을 세우게 한다. 다음이 ‘프레젠테이션’ 능력을 키우라는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몇십 초 안에 상사를 설득시킬 정도가 돼야 한다. 요즘 남학생들은 ‘마마 보이’가 많다. 앞으로 뭘 할지도 잘 모르는. 그럴 때면 저녁에 술 한잔하면서 다시 내가 겪은 얘길 들려준다.”











고 정주영 회장.



j칵테일 >> 왕 회장에게 ‘또 깨지나 보다’ 하고 갔더니



당시 이충구 부장이던 시절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그라나다’ 승용차를 타고 있었다. 어느 날 지시가 내려왔다. 타보니 불편한 게 있는데 이런저런 것을 바꾸라고. 이 부장은 슬쩍 반발했다. “금형도 바꿔야 하고, 시간도 걸리고, 무엇보다 차(車) 무게가 많이 나갑니다.” 그때는 차 중량을 1g이라도 줄이려 할 때였다.



 그러자 ‘왕(王) 회장’의 호통이 나왔다. “너 같은 기술자 얼마든지 있어. 그거 조금 바꾸는 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라고. 깨지고 밤이 됐다. 정 회장은 울산에 오면 자동차·중공업을 들른 뒤 임직원 격려 자리를 만들곤 했다. 갑자기 “이 부장 호출이다. 회장님이 오라는데…”라는 연락을 받았다.



 겁이 덜컥 났다. “또 깨지나 보다” 하고. 가 보니 중역들이 앉아 있었다. 숟가락은 들지도 못했다. 마지막에 회장이 불렀다. “그놈 와 있나” 하고. 어깨를 두드리면서 한마디 했다. “힘들지.” 이 부장의 눈에서 물방울 같은 게 떨어졌다.



 그 뒤로 한 달쯤 지났다. 회장실 호출이 왔다. 현대중공업에 가서 임원들에게 강의를 하라는. 알고 보니 배를 만들었는데 무게가 너무 나가서 선체 인수를 거부당했다고 했다. 화가 난 왕 회장에게 갑자기 이 부장이 떠오른 것이었다. 무게 줄이는 데 능통한.



 강의실에 도착한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저는 후판 이런 거 모릅니다. 다만 자동차는 구멍 하나 뚫으면 몇 g 무게가 달라집니다. 이게 200개 모이면 또 그만큼 중량이 달라집니다. 그렇게 민감하게 무게를 다룹니다.” 사람을 기억하고, 실수를 북돋워주고, 제때 쓰는 것. 그가 정 회장에게서 배운 인생의 교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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