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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참이 쓰러졌다”… 미 수뇌부, 병원 대신 백악관으로 뛰었다





레이건 암살미수 30년 … 1981년 당시 작동한 국가 위기 매뉴얼



1981년 2월 4일 촬영된 레이건 행정부의 출범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조지 부시 부통령,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 뒷줄 왼쪽부터 레이먼드 도노번 노동장관, 도널드 리건 재무장관, 테렐 벨 교육장관, 데이비드 스톡먼 행정관리·예산국장, 앤드루 루이스 교통장관, 새뮤얼 피어스 주택·도시개발 장관, 윌리엄 프렌치 스미스 법무장관, 제임스 와트 내무장관, 진 커크패트릭 유엔주재 대사, 에드윈 미즈 3세 대통령 자문, 제임스 에드워드 에너지장관, 맬컴 볼드리지 상무장관, 윌리엄 브록 무역대표, 리처드 슈웨이커 보건복지장관, 존 블록 농업장관, 윌리엄 케이시 CIA 국장. [레이건기념관 제공]





30년 전인 1981년 3월 30일 오후 미국 워싱턴DC 힐튼호텔 앞. 기자들과 시민들이 포토라인 뒤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이 호텔에서 연설을 하고 나오는, 취임한 지 70일 된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을 보기 위해서였다. 늦게 온 기자가 앞줄의 시민들에게 자리 양보를 부탁했다. 그러자 베이지 재킷 차림의 젊은 청년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나는 여기 맨 처음 왔다. 당신네 기자들은 뭐든지 다 마음대로 된다고 생각하는가.” 청년은 제자리를 계속 지켰다. 오후 2시27분 VIP 출입구를 통해 호텔 밖으로 레이건이 나왔다. 청년은 상의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1.7초 동안 6발을 발사했다. 마지막 총탄이 레이건을 맞혔다.



 소식을 들은 미국 국가안보팀 수뇌부가 백악관 상황실로 몰려들었다. 외부에서 황급히 들어오던 리처드 앨런(Richard Allen) 국가안보보좌관과 짐 베이커(Jim Baker) 백악관 비서실장의 차는 거의 부딪칠 뻔했다. 국무·국방·재무 장관 등이 속속 모였다. 당시 텍사스 상공을 비행 중이던 조지 부시(George Bush) 부통령(나중에 대통령을 지냄)만 부재였다. 이들은 이미 준비돼 있던 국가위기 매뉴얼대로 움직였다. 그 누구도 레이건이 수술을 받고 있는 조지워싱턴 대학병원을 찾지 않았다. 국가위기의 순간에는 대통령 개인보다 미국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레이건 암살 미수 사건’ 발생 30년을 맞아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사건 막전 막후의 모습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리처드 앨런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은 27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 특별기고를 통해, WP의 안보 전문기자 델 퀜틴 윌버(Del Quentin Wilber) 기자는 최근 발간한 자신의 책 『고참이 쓰러졌다(Rawhide Down)』를 통해 숨 가빴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고참(rawhide)은 당시 경호실에서 쓰던 레이건 대통령의 암호명이었다.









1981년 3월 30일 미국 워싱턴의 힐튼호텔 앞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존 힝클리가 쏜 총에 경찰관(앞)과 제임스 브래디 백악관 대변인(뒤)이 맞아 쓰러져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방탄차 문에 튕긴 총탄 한 발을 가슴에 맞았다. 여섯 발을 발사한 힝클리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브래디 대변인은 이 총격으로 하반신을 못쓰게 됐으며 이후 총기금지법(브래디 법)을 통과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게티이미지 멀티비츠=본사특약]





 당시 레이건에 대한 경호는 허술했다. 범인 존 힝클리(John Hinckley)는 재킷 안주머니에 총을 넣고 호텔 로비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포토라인 맨 앞줄에 섰다. 누구도 그를 검색하는 사람은 없었다.



 비밀 경호원 제리 파(Jerry Parr)는 레이건을 대기하고 있던 방탄 리무진 속으로 밀어 넣고 자신의 몸으로 덮었다. 총에 맞았느냐는 그의 질문에 레이건은 “아니. 그런데 당신이 내 몸을 덮칠 때 가슴을 다친 것 같아”고 대답했다. 어디에도 피의 흔적은 없었다. 파는 무선으로 “‘고참’은 안전하다”고 보고한 뒤 백악관을 향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숨쉬기를 힘들어하고 있었다. 이내 그의 입에서 거품투성이의 피가 흘러나왔다. 폐에 출혈이 생겼음을 직감한 파는 곧바로 차를 조지 워싱턴 대학병원으로 돌렸다. 레이건은 죽어가고 있었다. 몸 전체 피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외과의들은 여러 차례 총탄을 찾으려 애썼다. 심장 바로 1인치 옆에서 총탄이 나왔다. 총탄은 곧바로 레이건에 맞지 않고 방탄 차문에 한 차례 먼저 부딪쳤던 것으로 조사됐다. 레이건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유 중 하나였다.



 레이건이 수술 중이던 시점, 헌법상 대통령 승계 1순위인 부시 부통령은 텍사스 상공을 날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한동안 보안이 확보된 전화를 통해 긴급상황을 즉각 보고받지 못했다. 텔레타이프 통신을 통해 겨우 내용을 파악하곤 백악관으로 향했다. 부시가 도착하는 그 몇 시간이 문제였다. 알렉산더 헤이그(Alexander Haig) 국무장관이 기자들에게 “이제 백악관은 내가 컨트롤한다”고 말했다. 미국 헌법상 부통령→하원의장→상원 임시의장의 승계 서열을 깡그리 무시한 발언이었다. 백악관 상황실에 있던 도널드 리건(Donald Regan) 재무장관은 소식을 듣고 “헤이그가 미쳤나?”라고 말했다. 캐스퍼 와인버거(Casper Weinberger) 국방장관도 “틀렸어. 헤이그는 그런 권한이 없어”라고 소리쳤다. 앨런은 역사적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관행을 어기고 상황실 회의 전체를 녹음하고 있었다. 야심가 헤이그는 레이건 정부 출범 때부터 자신이 국가안보의 총책임자가 되려 했다. 안보기관 간 조정기능은 백악관의 몫임에도 수시로 영역 다툼을 벌였다.



 이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앨런은 헤이그의 전횡을 막기 위해 국가위기 발생 시 외교 경험이 풍부하고 CIA 국장을 거친 부시 부통령을 위기관리팀 수장으로 지명할 것을 레이건에게 건의했다. 레이건이 이 같은 내용의 위기관리 매뉴얼에 서명한 것은 3월 24일, 사건 발생 불과 6일 전이었다. 헤이그와 앨런까지 참석한 6시간 동안의 상황실 회의는 그래서 조금의 혼란도 없었다. 매뉴얼에 있는 대로 각 부서가 담당해야 할 일들을 차분히 점검했다. 그사이 백악관에 도착한 부시 부통령이 조용히 지휘봉을 잡았다.



 레이건은 수술 뒤 12일 만에 백악관으로 돌아왔다. 예전의 레이건이 아니었다. 암살을 이겨낸 영웅이었다. 재선을 포함해 8년 동안 미국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정권 내부에서 발생한 이란 콘트라 스캔들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레이건은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정치적으로 무적의 대통령이 됐다.



워싱턴=김정욱 특파원



◆레이건 암살 미수 사건=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25살의 청년 존 힝클리가 자신이 집착했던 영화 배우 조디 포스터의 관심을 끌기 위해 레이건 대통령을 향해 총격을 가했던 사건. 힝클리는 정신이상이 인정돼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지 않았다. 지금도 정신병원에 수감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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