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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간서치









조선 후기 학자 이덕무(李德懋)가 쓴 『간서치전(看書痴傳)』이란 글이 있다. “목멱산(木覓山:남산) 아래 치인(痴人)이 있다”로 시작하는 글이다. ‘치인(痴人)’은 매니어를 뜻하니 간서치는 독서광(讀書狂)이다. 이 글에서 이덕무는 “오직 책보는 즐거움에 추위와 더위, 배고픔도 전혀 알지 못했다”고 썼다.



 중국의 대표적 서치(書癡)는 당(唐)나라 두위(竇威)다. 『신당서(新唐書)』 『두위 열전』은 “그의 집안은 대대로 귀가였다(家世貴)”고 전하는데, 그의 부친 두치(竇熾)는 주(周)나라 상주국(上柱國)이었다가 수(隋)나라에서는 태보(太傅)였고, 당(唐)의 시조 이연(李淵)의 황후인 태목(太穆)황후 두씨가 조카뻘이었다. 혼란기였기에 모두 무예를 좋아했지만 두위만 글을 숭상하자 형들이 서치(書癡)라고 흉보았다는 것이다. 이덕무는 『간서치전』에서 “그의 전기를 쓰는 사람이 없어서 붓을 들어 ‘간서치전’을 썼는데 그 성명은 기록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 자신의 소전(小傳:짤막한 전기)이다. 이덕무는 이 글에서 “특히 자미(子美:두보(杜甫))의 오언율시(五言律詩)를 좋아했다”고 전한다.



 시성(詩聖) 두보가 문재(文才)를 지니고도 평생 곤궁했던 것처럼 이덕무도 종실(宗室:임금의 친족) 이성호(李聖浩)의 아들이었지만 서자(庶子)였기에 곤궁했다. 이덕무의 자호(自號) 청장관(靑莊館)은 눈앞의 먹이만 먹고 사는 해오라기 물새 청장(靑莊)에서 딴 것이다. 조선 후기 노론(老論) 벌열 카르텔 사회에서 이런 자호를 지닌 서자는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이덕무는 『간서치전』에서 “집안사람들은 그의 웃음을 보면 그가 기서(奇書)를 구한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독서가였지만 며칠씩 굶기가 예사였다.



 그런데 정조가 재위 1년(1777) 서자들의 벼슬길 진출을 허용하는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을 반포하고 재위 3년(1779) 이덕무·박제가·유득공·서리수 등 4명의 서자를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특채하면서 음지에 볕이 들었다. 신분 카르텔이 완화되자 이들은 사검서(四檢書)라 불리며 단숨에 조선 후기의 지식계를 평정한다. 신정아씨 사건은 한국 사회의 학벌 카르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언제나 정조 같은 인물이 나와서 학벌 카르텔을 무너뜨릴 것인가? 지난 주말 이덕무의 집 근처였던 종각 부근의 한 서점에서 독서클럽 회원들과 만남을 갖다 보니 떠오른 사회 단상(斷想)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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