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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민 전 의원 인간 金大中이야기<6>]“북핵 때문에 내 마음이 급해요, 빨리 귀국해야겠소”

영국에서 귀국하기 직전 이스라엘을 방문한 DJ가 이희호 여사와 요르단강에서 찍은 사진이다. 관절염을 앓는 이 여사의 손을 주무르는 모습. 93년 7월 2일이다. [장성민 제공]
DJ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뭘까. 그를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에 따라 천양지차의 단어들이 튀어나올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객관적 입장이거나 외국인이라면 아마도 ‘햇볕정책’(sunshine policy)을 떠올릴 가능성이 크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6·15 정상회담이나 노벨 평화상 수상 등도 따지고 보면 모두 햇볕정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대체 DJ는 햇볕정책을 언제, 어디서 구상했을까. 김대중 자서전을 보면 그게 1994년이라고 돼 있다.

햇볕정책의 탄생

훗날 남북 화해·협력을 상징하는 ‘햇볕정책’이라는 말은 94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처음 사용했다. 미국 보수진영의 정책 산실로 알려진 헤리티지 재단의 초청 연설에서였다. 연설의 주제는 ‘강한 의지에 입각한 태양정책’이었다. 당시에는 ‘햇볕’이 아닌 ‘태양’으로 지칭했다(자서전 1권 643쪽).

그러나 좀 더 정확히는 그보다 한 해 전인 93년 봄 ‘케임브리지 대학에 있을 때’라고 하는 게 맞다. 햇볕정책의 근간인 흡수통일 반대와 대북 포용론, 개성공단 건설, 북핵 문제 일괄 타결(package deal)등 핵심적인 개념이 모두 그때 나왔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하려는 게 그 얘기다.

DJ 자서전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를 제작하러 왔던 김영사 박은주 사장이 돌아간 뒤 나는 일주일쯤 케임브리지에 더 머물렀다. 93년 4월 말, 귀국 전날 밤이었다. DJ가 서재로 불러 동교동에서 내가 할 일을 지시했다. “장 동지가 돌아가면 안기부가 도청을 강화할 거예요. 가능하면 외부 통화를 하지 말고 사람들과 할 얘기가 있으면 만나서 하세요.” 그러면서 당신한테 전화할 때도 암호로 하라고 했다. 난 무슨 소리인지 몰라 물끄러미 바라봤다. “청와대하고 김영삼 대통령은 A씨, 야당과 이기택은 B씨, 신한국당은 C씨, 동교동 관련 문제는 D씨, 이렇게 정해서 대화하는 게 좋겠어요.” DJ가 말했다. 나는 책상에 있던 A4용지 두 장에다 A·B·C·D와 그게 의미하는 대상을 적어서 한 부는 드리고 한 부는 간직했다. 지금에야 웃어넘기지만 평생 야당을 한 DJ는 도청 공포가 극심했다. 자택인 동교동 지하 서재에서도 민감한 대목은 종이로 필담을 했다. 집 전체가 도청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DJ가 종이에다 ‘그 사람 만났어요?’ 하고 묻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누구 말씀인데요?’ 하고 적으면 DJ가 ‘문익환’ 하면서 동그라미를 치는 식이다. 아무튼 그 뒤 서울에서 영국으로 전화 보고를 할 때는 “총재님, B씨 말인데요” 하면서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밤에는 햇볕정책의 단초를 엿볼 수 있는 얘기도 나왔다. DJ가 말했다. “내가 국내에 들어가면 연구 기구를 운영해 볼 생각인데, 어디에 싸고 괜찮은 장소가 있는지 알아보세요. 서둘 필요는 없고, 내가 남궁진 의원에게 별도로 지시할 테니 장 동지는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단 절대로 외부에 알려지면 안 돼요.” 나는 DJ가 연말에나 귀국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했다. “총재님, 벌써 귀국을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아, 벌써라니. 두어 달 후면 영국에 온 지 반 년이 되는데.” “총재님, 지금은 귀국 조건이 무르익지 않은 것 같은데요.” “조건이라니 무슨 조건 말이여?” 나는 몇 가지 이유를 들었다. 우선 김영삼(YS) 대통령의 인기가 아직 꽤 높다. 대통령 지지도가 30%대로 떨어져야 힘이 빠진다. 자서전도 한참 있어야 출판된다. 그게 나와야 지방 순회 강연을 다닐 수 있다. 또 민주당은 이기택 대표가 맡은 지 얼마 안 되는데 강력한 야당 지도자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다는 등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DJ가 말했다. “그걸 생각 안 해본 게 아녜요. 그런데 한반도엔 이미 북한 핵이라는 먹구름이 깔려 있어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했고, 긴장이 조성되고 있어요. YS가 대북 강경 일변도로 가서 사태가 최악이 되고 있어요. 대결과 긴장을 막을 대안을 정치권에서 제시하지 못하고 있어요. 북·미관계도 최악인데 전쟁위기로 갈 수도 있어요. 내 맘이 대단히 급해졌어요. 한가롭게 연구소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6월 말에 한국에 돌아갈 예정입니다. 지금 얘긴 절대로 알려지지 않게 하세요.”

DJ의 귀국 의지는 워낙 굳었다. 당시 DJ는 만일 정계 복귀가 영영 불가능하게 되면 카터센터 같은 걸 운영하면서 통일 문제에 전념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3월 8일 내가 처음 영국을 처음 방문할 때도 독일 통일과 유럽 통합 관련 자료를 찾아서 가져오라고 지시한 것이다. DJ는 영국에 있으면서 세 번이나 독일을 방문한다. 남북 통일의 모델을 찾아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거기서 독일 대통령도 접견하고 동독의 마지막 총리도 만난다. 이들과 대화하면서 내린 결론이 “흡수통일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통일된 독일은) 정치적 분단은 청산했지만 내부의 경제적 사회적 분단은 여전했다…(중략).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내게 말했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지만 마음의 장벽은 그대로 있습니다.’ 이러한 이질성을 극복하려면 적어도 30년은 걸릴 것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조급한 흡수통일은 사회 전반에 거의 재앙 수준의 문제를 안겨주었다. 독일 통일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중략) 내가 베를린에서 만난 로타어 데메지에르 동독의 마지막 총리는 거듭 후회하고 있었다. “우리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절대로 흡수, 합병 형식을 취하지 말고 단계적 통일 방식을 취해야 했습니다.”(자서전 1권 618쪽)

귀국 한 달 전인 6월 8일, DJ는 런던대 강연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구상을 발표했다. ‘북한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란 제목의 강연인데 여기서 북한을 이솝 우화에 빗대 얘기한 것이다. “한국은 러시아·중국과 수교했는데 북한은 미국·일본과 수교하지 못해 위기감을 갖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강경하게 나가면 북한에도 강경파가 득세해 한반도에 위기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북한이 주변국과 교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라 햇볕이다.” 그런 주장이었다. 개성공단에 대한 계획도 이미 그때 언급됐다. DJ는 “독일 통일을 연구해보니 경제교류가 가장 확실한 평화 보장책이더라. 나는 지금 경제특구안을 포함한 새로운 통일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또 북핵을 못 막으면 동아시아에 핵 도미노 현상이 올 수 있으니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미국과 일본·유럽이 북한과 수교하고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을 약속하는 일괄 타결(package deal) 방식이 필요하다는 말도 했다. 귀국 직전인 7월 1일, 이스라엘 히브리대에서 한 연설도 런던대 연설과 관점이 비슷했다. 햇볕정책의 대략적인 틀이 갖춰진 것이다.

7월 4일 오후5시30분. 영국으로 떠난 지 6개월 만에 DJ가 김포공항으로 되돌아왔다. 수천 명의 환영 인파가 나왔다. DJ는 화단에 올라가 즉석 연설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정치할 것으로 기대하고 언론도 그렇게 보도하는데 난 정치를 안 합니다. 내가 안 한다는데 누가 강제로 시키겠습니까. 통일 문제에 매진하겠습니다.”

통일 문제에 매진하겠다는 건 DJ 말대로 됐다. 하지만 정치를 안 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약속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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