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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빛’ 유관순·박에스터 …한국 여성 지도자의 산실

이화학당 본관 자리에 방향을 남쪽으로 틀고 들어선 126년 전통의 이화여자고등학교. 정원에는 한국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기념비가 서 있다. 언덕 아래 ‘유관순 우물’이 보인다. 신동연 기자
“여성병원에는 지금,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코와 손가락을 잘린 한 여성이 입원해 있다. 흔히 벌어지는 정죄라고 했다.…한국에는 진실한 남자가 거의 없다. 그들의 코와 손가락은 과연 누가 자를까?” 1893년 10월 10일 노블(M. W. Noble) 여사의 일기 내용이다. 너무 가난해서 13세 여동생을 팔아버리려는 오빠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소녀의 어머니는 머리칼을 팔아서 어린 딸을 서울 이화학당에 보내려고 한다. 무식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래도 평양 근처 진남포에서 서울까지의 뱃삯과 차비에는 턱없이 모자랐는데 노블 여사가 반을 보태준다.

근대화 시기 우리나라 여성과 어린이의 인권침해는 상상 이상이었다. 양반집 아녀자가 아니면 교육받을 기회조차 없었다. 특히 여성들은 병이 나도 대부분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가부장적 가치관이라는 전통과 인습의 굴레 속에서 고통받는 부류가 여성이었다.

설립자 스크랜턴 여사, 대부인 기품 지녀
정동 예원학교 맞은편에는 정겨운 토담길이 있다. 덕수궁 드높은 돌담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이화여자고등학교 동문(東門) 바로 옆에는 하마비가 서 있는 옛 대문이 있다. 문은 담이라고 하는 차단의 벽에 내놓은 선택적 통과의 공간이다. 문 밖 사람과 문 안 사람들은 의식구조와 세계관은 물론 신분이나 소속이 다르다. 때로는 구원의 경계가 되기도 한다. 일찍이 개화기에 이 문으로 들어선 사람들은 분명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문 안에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자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발견이야말로 근대가 준 선물이다. 차별받던 ‘암흑의 나라’ 여성들이기에 그 선물은 더 값졌다.

1886년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1832~1909)은 이 토담 안에 조선 여인들의 해방구를 열었다. 이화여고와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의 설립자 스크랜턴은 대부인의 기품을 지녔던 듯하다. 1872년 남편과 사별한 그는 1885년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의 파송으로 의사인 외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함께 한국에 온다. 새 터를 잡고 곳곳에 건물을 세운 그는 왕성한 창업자의 면모를 보인다. 한국 최초의 여성 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설립했고 동대문감리교회, 아현감리교회, 상동감리교회를 세웠다. 이 땅에 여생을 바친 그는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혔다.

기부자 이름을 붙인 ‘심슨홀’은 1915년 건축돼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 3호로 지정돼 있다. 이화박물관과 교지 ‘거울’ 편집실로 쓰인다. (복원 공사 뒤 올 하반기 개장 예정)
“우리의 목표는 여인들로 하여금 우리 외국인들의 생활양식, 의복 및 환경에 맞추어 바꾸어지기를 바라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다만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이 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의 한국여성 교육관이었다. 1886년 11월 학교 교사를 ㄷ자형 200칸 규모의 기와집으로 지은 것도 그래서다. 교실과 기숙사를 갖춘 번듯한 교사를 세웠지만 지원자가 하나도 없었다. 신학문과 영어를 배워 출세하려고 청년들이 몰려들었던 배재학당과는 딴판이었다. 반년이 지나서야 첫 학생을 받았다. 고관의 소실 김부인이었다. 한 달 뒤 10살가량의 꽃님이가 왔고 4살 난 별단이도 왔다. 꽃님이는 가난한 어머니가 도저히 부양할 길이 없어 맡긴 경우였고 별단이는 1886년 여름 서울에 돌았던 콜레라에 걸려 버려진 여인의 딸이었다. 의사인 아들 스크랜턴이 성 밖에서 발견하고 데려다 치료했다.

이화여고 동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높은 성벽이 보인다. 서대문과 서소문 사이 성벽 일부가 남은 유적이다. 지금은 교정이 훨씬 넓어져 성벽 바깥 순화동 쪽에 도서관과 운동장, 유관순기념관, 체육관 등이 세워졌지만 초창기는 성벽 안쪽으로 정동교회와 접한 공간이 전부였다. 백주년기념관 자리에는 유명한 손탁호텔이 있었다. 2층으로 된 이 서양식 호텔에서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이 치열한 각축전을 펼쳤다. 정동구락부의 모임 장소로도 이용된 손탁호텔은 100년 전의 국제도시 정동의 중심이었다.

심슨홀은 126년 역사 압축한 박물관 변신
이화박물관이 된 심슨홀은 10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켜온 등록문화재다. 문화유적과 유물은 현장이라는 장소성과 맞물릴 때 가치가 제대로 드러난다. 이 건물에서 한국여성 신교육 126년사를 체험하는 일은 새뜻하고 값지다. 지금은 한창 복원공사 중이어서 외관만 볼 수 있고 박물관 관람은 하반기에나 가능하다.

이화여고 본관 정원에는 한국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기념비가 서 있다. 동향으로 지어졌던 이화학당 초창기 건물 자리다. 정원 남동쪽 아래에는 오래된 우물 하나가 있다.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우물’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학한 유관순 열사는 3·1운동 때 만세시위를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순국했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의 영웅이자 민족의 영웅이다. 영웅이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자신보다 더 큰 가치에 기꺼이 바친 숭고한 이를 말한다. 이화학당은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명문의 상징이다. 그런데도 굳이 이 우물까지 유관순 열사와 결부시켜야만 했을까. 유관순기념관과 동상이 세워졌으니 이제는 이 표지판과 유관순 우물이라는 명칭은 떼어도 좋을 듯하다. 무엇이건 넘치면 도리어 의미가 퇴색되기 쉽다.

1900년,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인술을 펼친 최초의 여성 양의사 김점동(박에스터), 한국여성 최초로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와 여성 계몽운동을 펼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북경에서 독살당한 하란사 등은 위대한 이화인들이다. 그가 입학 당시 학당장 프라이 앞에서 보였던 등불 퍼포먼스는 경전 속 에피소드처럼 감동적이다. 그는 이화학당에서 배우기 위해 여러 차례 문을 두드린다. 기혼자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하자 하인에게 등불을 들려 다시 찾는다. 학당장 앞에서 등불을 끈 그는 “내 삶이 이렇게 어둡다”고 호소해 1896년 마침내 입학을 허락받는다.

이화여고의 명물 가운데 하나가 6000석 규모의 노천극장이다. 로마 원형극장을 떠올리게 하는 석조 계단에 앉아서 이화의 정신을 가늠해본다. 입학식과 졸업식, 신앙부흥회, 연극이나 공연도 여기서 한다. 졸업생들은 각별한 추억을 잊지 못해서 수시로 찾아와 이 극장에서 동기들 기도회 같은 행사를 연다. 어수선했던 한국전쟁 직후인 1956년, 이런 노천극장을 교내에 세우고 빙 둘러앉아서 자칫 의례적일 수도 있는 행사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할 줄 알았던 이화인들이 참 멋지다. 시간에 매몰되기 쉬운 인간의 기억은 공간과 함께 묻어온다. 사소한 의식일지라도 장소가 각별하면 의미가 더 깊어지고 오래가는 기억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이화여고생들은 걸어가는 뒷모습만 봐도 금방 알아볼 수가 있어요. 느긋하고 자유롭습니다. 잘난 사람들 앞에서도 열등감이 없고요. 언제 어디서나 ‘약한 이 힘 되고 어둠의 빛 되자’는 교가 구절이 가슴 저마다에 새겨져 있는 것이죠. 큰 교육자 신봉조(1900~1992) 교장선생님의 영향이 컸다고 봅니다. 선생님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게 개성이고,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 가진 재주가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학교법인 이화학당(이화여대) 장명수(69) 이사장은 신문기자 시절 칼럼을 쓸 때마다 격려 전화를 해줬던 은사를 숭경한다. 신봉조 선생은 23년간 이화여고 교장을 지내고 한평생 이화에 혼을 쏟아부었다. 생활은 검박하고 교육적 이상은 원대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 가서 임시학교를 운영할 때,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예술학교를 구상했던 선구자였다.

이화학당은 창설 이래 1907년까지 약 200명의 학생을 교육하고 결혼까지 시켜 내보냈지만 정식 졸업식은 하지 못했다. 학생이 나이 들면 선생님들이 신랑과 혼수품을 구해 시집을 보내주었다. 결혼이 곧 졸업이던 시절이었다. 1904년 4년제 중학과 설치에 따라 1908년 6월 비로소 1회 졸업식을 거행하고 5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이화인 정신은‘나눔과 섬김’
1908년 동창들의 친목을 위한 연락체로 동창회가 발족한다. 이들이 ‘신여성’ 1세대들이다. 이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여성상인 신여성이 등장한다. 그전까지는 여학도로 불렸다. 신여성이란 봉건적 인습을 떨쳐내고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민족해방운동, 남녀평등을 위한 여성해방운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의식적인 노력을 하는 여성이다. 배운 여성으로서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화정신은 동창회 활동을 통해 구현되었다.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출범한다. 첫 교장은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가 한국에서 얻은 딸, 앨리스 아펜젤러다. 그는 이 땅에서 태어난 최초의 백인 아기다. 그의 어머니가 이화의 창설자 스크랜턴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이미 어머니의 태중에서 자라고 있었다. 아버지 아펜젤러가 세운 정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한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웨슬리대학을 졸업한 그는 이화여전을 모교와 닮은 여자대학으로 키우고 싶어 했다. 오늘날 이화여자대학교는 세계 최대의 명문 여대 중 하나로 성장했다. 이화여고와는 뿌리를 같이하지만 이후 다른 법인으로 분리되었다.

“고종은 배재학당보다 더 먼저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내려줍니다. 그런데 그 현판은 물론 초창기의 유물들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했습니다.” 이종용(66) 박물관장은 기획전시 유물 확보와 복원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이화학당은 한국 여성교육사의 중심이다. 초창기 터전을 지켜내지 못하고 변두리로 밀려난 대부분의 학교들과 달리 이화여고는 정동 터에서 더 확장하며 발전해왔다. 이화가 서울시민과 온 국민에게 이화의 정신에 서린 한국 여성교육사를 소곤소곤 이야기해줘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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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