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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200만 대군 맹신한 고종, 일본 패배에 ‘베팅’

러일전쟁이 터진 직후인 1904년 2월 9일 제물포에서 일본 군함의 공격을 받고 불길에 휩싸인 러시아 함정 ‘바랴크’와 ‘코리예츠’. 러시아 측은 격침된 게 아니라 자폭의 길을 택했다고 주장한다. 매년 2월 9일 러시아 수병들이 인천 앞바다에 와서 추모식을 하고 있다. 사진은 영국 주간지 ‘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가 1904년 4월2일자에 보도한 화보. [명지대 LG연암문고 제공]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①고종의 오판


황성신문(皇城新聞) 1904년 1월 25일자는 “근일 각국의 보호병(保護兵)이 서울에 들어오고 일아(日俄:일본과 러시아) 개전론설이 유포되면서…곡식값이 뛰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러일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서울의 곡식값이 뛰었다는 보도다.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했고, 각국으로부터 중립국임을 인정받으려 노력했다. 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 명치(明治) 37년(1904) 2월 8일자는 육군 참령 현상건(玄尙健)이 고종의 명을 받아 각국으로부터 서울을 국외중립지대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하는데 서울의 곡식값이 뛰는 이유는 한국이 전쟁터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한국은 승전국의 전리품이 될 운명이었다.

이런 성격의 국제전에 국외중립 선언은 허망한 몸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황현이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고종은 자신의 웅대한 지략을 자부한 나머지 불세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고 쓴 데서 알 수 있듯이 고종은 외교적 수완으로 전제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일본군 선발대 2500여 명이 인천 외항에 도착한 1904년 2월 8일 일본 해군은 요동(遼東)반도 남단의 여순(旅順)항을 기습공격하는 것으로 러일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다음 날 일본 해군은 다시 인천 앞바다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해 순양함 바랴크(Varyag)함과 코리예츠(Koryeets)함을 가라앉혔고, 같은 날 중립선언을 무시하면서 서울에 입성했다. 정식 선전포고는 다음 날에야 발표했다.

1 1904년 한일의정서 서명 뒤 이토 히로부미 특명전권대사(앞줄 가운데). 이토의 왼쪽이 이지용 외부대신 임시서리. 2 압록강을 건너는 일본군. [사진가 권태균 제공]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고종은 러시아의 승리를 굳게 믿고 있었다. 청일전쟁 직후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되돌려주는 것을 보고 러시아의 힘을 실감한 고종이었다. 김홍집(金弘集)의 온건개화파 내각이 주도하는 갑오개혁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국 주둔 외국공사관으로 망명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란 희한한 사건도 러시아의 힘을 굳게 믿은 결과였다. 일본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2월 12일 주한 러시아공사 파블로프(A. Pavlow)는 러시아공사관 병사 80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을 빠져나갔고, 다음 날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노스케(林權助)는 외부대신 임시서리 겸 육군참장(陸軍參將) 이지용(李址鎔:대원군의 형 이최응의 손자, 합방 후 백작 수여)과 고종을 만나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을 강요했다.

한일의정서는 제3조에서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고 명기했다. 그러나 제4조에서 “대일본제국 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하여 이용할 수 있다”며 한국 영토의 무제한 징발권을 명시했다. 속으로는 러시아의 승리를 바라면서도 겉으로는 일본의 강압에 굴복해 무제한 국토사용권을 주는 의정서를 체결한 데서 고종의 이중성이 다시 드러났다. 고종이 러일전쟁에 대해 중립을 선언한 데는 함경북도 명천의 서민 출신 이용익(李容翊) 등 친러파의 주청이 큰 영향을 끼쳤다. 같은 친러파였던 육군참장 이학균(李學均)은 현상건과 모의해 전(前) 러시아 주재 한국참서관(參書官) 곽광의(郭光義)를 여순(旅順)에 보내 러시아에 조선을 보호령으로 해 달라고 요청하려고도 했다. 이학균과 현상건은 일본의 납치를 피해 프랑스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미국 군함 신시내티호를 타고 상해(上海)로 망명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에 따르면 이학균과 현상건은 서울에서 탈출한 파블로프 러시아공사와 접촉한 후 고종에게 ‘러시아가 일본을 격퇴하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것이니 잠시 때를 기다리소서’라는 밀서를 보냈다. 고종도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난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상해로 보냈다.

고종이 러시아의 승리를 점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객관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우세했다. 그러나 일본은 러시아에 없는 다른 무기들을 갖고 있었다. 전 국민적인 단결과 군부의 뛰어난 전략전술이었다. 러시아군은 총 병력이 약 200만 명에 달하고 전함의 배수량은 약 51만t이었으나 일본은 상비군이 20만 명에 불과했고 배수량은 26만t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전쟁에 모두 108만 명을 동원할 정도로 총력전을 펼쳤다. 일본에도 전쟁폐지론을 주장했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같은 사상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세가 미약했다. 러시아는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 상륙해 북상할 것으로 예상하고 압록강 부근에 군대를 집결시켜 맞서 싸울 계획이었다. 이에 맞서 일본은 해군 제1함대와 제2함대로 여순의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섬멸하고, 제3함대로 대한해협(대마도 해협)을 장악해 제해권을 확보한다는 더 큰 전략을 세웠다. 또한 육군 제1군을 한반도에 상륙시켜 한국에 있는 러시아군을 구축하고, 제2군을 요동반도에 상륙시켜 여순을 고립시킨다는 전략이었다.

일본은 외교전에서도 앞섰다. 단기간에 승부를 내지 않으면 불리하다고 생각한 일본은 전쟁을 신속히 끝내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했다. 전비(戰費)는 약 15억 엔(円)에 달했는데 이는 2억3000만 엔 정도였던 1년 예산의 7배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시어도어 루스벨트(T. Roosevelt) 미국 대통령의 하버드대 동창생인 귀족원 의원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를 1904년 2월 특사로 보내 미국의 중재를 부탁했다. 여기에 훗날 한국 주차헌병대 초대 사령관이 될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대좌의 주도로 일본군의 기막힌 첩보공작이 보태졌다.

1901년 1월 주(駐)프랑스공사관 무관을 거쳐 1902년 8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간 아카시는 러시아 내부를 분열시키는 것이 불리한 전세를 승리로 전환시키는 첩경이라고 믿었다. 이때 아카시가 참모본부에 요구한 공작금 100만 엔은 현재 화폐단위로 약 400억 엔(약 5400억원)이나 되는 거액이었다. 참모본부에서도 난색을 표했으나 일본 군부의 실력자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참모본부 차장 나카오카 가이시(長岡外史)의 결단으로 지급이 결정되었다. 막대한 공작금은 러시아 내부 분열을 획책하는 공작금이었다. 아카시의 유고(遺稿)인 낙화유수(落花流水)에 따르면 그는 이 자금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스트라이크, 사보타주, 무장봉기 등을 획책했고 이에 따라 러시아 내 전쟁을 혐오하는 염전(厭戰) 분위기가 확산됐다고 전한다.

아카시는 스위스에 망명한 러시아 사회당의 레닌에게도 접근했다. 아카시의 자금 지원 제의에 레닌도 처음에는 ‘조국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거부했지만 아카시가 ‘타타르 사람인 그대가 타타르를 지배하는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일본의 힘을 빌리는 것이 무슨 배신인가’라고 설득하자 받아들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아카시의 설득보다는 국가를 지배계급의 이익실현 도구로 보는 레닌에게는 조국보다 혁명이 상위개념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된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사건’에도 아카시가 제공한 공작금이 한몫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동궁(冬宮) 앞 광장으로 평화 행진하는 노동자들에게 무차별 발포해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은 러시아를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갔다. 혁명도 때로는 적과의 동침도 서슴지 않는 정치의 한 과정임을 보여준 사례들이다. 러시아가 국력의 크기만을 믿고 방심하는 동안 일본은 전세를 뒤엎기 위해 모든 수단·방법을 동원했다. 1905년 1월 일본은 여순항을 함락시키고 3월의 봉천대회전도 승리했다.

해군은 더 극적이었다. 그해 5월 26일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군신(軍神) 이순신에게 승전을 비는 제사를 올리고 “황국의 부흥과 몰락이 이 한 번의 전투에 있다(皇國興廢在此一戰)”는 휘호로 임전(臨戰) 의지를 다졌다. 다음 날 일본 해군은 대한해협과 동해에서 예상을 뒤엎고 러시아 발틱함대를 궤멸시켰다. 러시아는 설상가상으로 6월 흑해함대의 전함 포템킨 수병들의 봉기까지 일어나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기가 곤란했다.

독일 황제 카이저는 “아카시 대좌 혼자 봉천 파견 일본군 3개 군단 25만 명에 맞먹는 일을 해냈다”고 말했다고 전해지지만 러시아도 적진 분열책으로 사용할 카드가 있었다. 제국 러시아에 사회당이라는 취약 요소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조선 의병이라는 취약 요소가 있었다. 러시아가 조선 의병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다면 일본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수만 명의 조선 의병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랬다면 러시아 사회당이 러시아 내부를 뒤흔든 것 이상으로 일본군은 조선 의병에게 발목이 잡혔을 것이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가자 고종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외교전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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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