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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룰라 대통령’을 기다리며

이달 초 브라질 상파울루에 출장갔을 때 들은 얘기다. 룰라 전 대통령이 2002년 대선에 도전했을 무렵 현지에서 이런 우스갯소리가 나돌았다고 한다.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의 부유층 자녀들이 룰라를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두 도시는 브라질에서 가장 잘사는 곳이다. 그렇다면 왜? 대답이 아이러니했다. 잘사는 사람들이 노동운동가 출신의 좌파인 룰라를 극도로 혐오해 “만약 룰라가 당선되면 미국 마이애미로 이사 가겠다”고 아우성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미국 가서 살기를 원하는 자식들이 룰라 당선을 바랐다는 얘기다. 그만큼 룰라는 부유층의 기피 대상이었다. 재계에선 당시 “기업인 80만 명이 해외로 떠날 것”이라는 협박성(?) 예측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룰라는 8년 임기를 마친 뒤 지지율 87%를 기록하며 퇴임했다. 브라질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기다. 그는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성장과 복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연 4%의 성장률과 빈곤층 2800만 명을 구제하는 성적을 거뒀다. 그 덕에 룰라와 노동자당(PT)은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이제는 룰라의 정적들마저 “모든 계층의 지지를 이끌어낸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칭찬한다. 정치지도자라면 누구든 부러워할 성공모델이다.

물론 룰라에 대한 냉정한 평가도 적잖다. 브라질에서 25년째 살고 있다는 한국인 교민 김모(54)씨는 “룰라는 우파 대통령이던 페르난두 카르도주(브라질 사민당)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갔을 뿐”이라고 말했다. 사회학자 출신인 카르도주는 대통령 연임을 허용한 헌법 개정 뒤 8년간 ‘헤알 플랜’이란 강력한 물가억제정책을 펼쳤다. 여기에 농산물·원자재값이 오르고 대형 유전이 잇따라 발견되는 행운까지 겹쳐 룰라 집권기에 경제가 선순환 사이클을 그렸다는 얘기였다. 그는 “룰라는 고임금과 높은 세율, 부족한 인프라, 관료 부패 같은 난제들엔 손도 못 댔다”며 열을 냈다.

룰라의 간판 정책인 ‘볼사 파밀리아’(빈민가정 지원제도)나 ‘포미 제로’(기아퇴치정책)에 대해서도 “나랏돈으로 유권자 표를 사는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는다. 저소득층에 돈을 퍼주느라 세금을 너무 올렸다는 것이다. 소비 진작을 통한 경기부양에 매달린 결과, 카드문화가 범람하고 ‘오늘을 즐겁게 살자’는 향락 풍조가 확산됐다는 지적도 있다. 예컨대 서민 가정에서 1만 달러짜리 국민차를 60개월 할부로 덜컥 샀다가 돈을 못 내 반납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또 다른 교민 박모(55)씨는 잦은 범죄와 치안 부재를 실정(失政)으로 꼽았다. 도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승용차 유리창을 깨뜨린 뒤 지갑을 강탈해 가는가 하면, 차량에 부착된 값비싼 내비게이션이나 오디오를 뜯어가는 행위는 애교에 속한다. 외국인을 노린 강도·납치 등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는다. 상파울루 시내 간선도로들은 비가 조금만 많이 와도 침수되기 일쑤다.

그러나 브라질 정치판에는 한국에서 찾기 힘든 미덕이 있었다. 필요하다면 전임자의 정책을 존중하고 정파 간에 타협을 하는 것이다.

룰라가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 인사들을 요직에 중용하는 ‘포용 인사’ 역시 인상적이다. 시장경제주의자인 야당 하원의원 엔히크 메이렐리스를 8년 임기 내내 중앙은행장으로 중용한 게 단적인 사례다. 그런 화합과 소통과 포용이 있었기에 상·하원 의석 가운데 20%밖에 안 되는 소수당 PT를 이끌고 성공하지 않았을까.

룰라의 성공에는 ‘윈윈 게임’의 또 다른 주역이 있었다. 연방하원에 1석이라도 갖고 있는 18개 정당, 즉 야당 세력이었다. 룰라가 재임 중 절묘한 합종연횡을 구사했다지만 만약 야당이 합심해 ‘룰라 때리기’로 일관했다면 그의 위상은 형편없이 추락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정치에 묻고 싶다. 민생 문제는 고사하고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같은 안보 위협에도 초당적 대처를 못하는 마당에 어떻게 화합·소통·포용의 정치를 할 것인가. 가까운 측근만 중용하는 ‘회전문 인사’와 ‘보은 인사’로 어떻게 성공한 대통령이 될 것인가.

상대방을 할퀴고 끌어내리는 정치문화에서 룰라 같은 지도자가 나온다면 그게 기적일 것이다. 국민소득 1만 달러인 브라질도 ‘룰라 리더십’이란 모델을 만들어냈다. 내년 총선·대선을 앞둔 여야 정치인들이 꼭 한번 벤치마킹하길 권유하고 싶다. 브라질 가서 이과수폭포만 관광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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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