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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지 못한 이들 보살폈던 정기용 선생 ‘식소사번<食少事煩>’의 삶

‘언제부턴가 나는 2월 말이 지나가는 것이 두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올해는 봄이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 나는 어떤 확신에 도달해 있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틀림없이 어느 해인가에는 봄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다’.

건축가 정기용 선생께서 10여 년 전에 어느 사보에 남겼던 글의 서두이다. 결국 올해 봄을 맞이하지 못하고 3월 중순 당신은 떠났다.

식소사번(食少事煩)이란 말이 참으로 어울리는 삶이었다. 삼국지의 제갈공명은 많은 일을 하는 것에 비해 먹는 게 너무 적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몸을 돌보지 않고 바쁘게 일한다는 의미였는데, 비틀기를 좋아하는 뒷날 사람들에 의해 ‘생기는 것도 없이 일만 많다’는 냉소적 뜻으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그 말처럼 일만 많고 돈 안 되는 설계는 늘 정기용 선생의 몫이었다. 주변의 넉넉지 못한 이들이 큰맘 먹고 내 집을 짓겠다는 그 희망을 뿌리치지 못하는 성정 때문이었다. 더불어 별로 실속 없는 실상사 일과 ‘신(新)해인사’ 계획 역시 소매를 걷어붙이고 거들어 주셨다.

지난해 가을에 건축기행을 주제로 한 어설픈 책을 출판하면서 서문을 부탁드렸다. 한참 뜸을 들인 후 원고가 도착했다. 놀랍게도 만만찮은 부피의 전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줄 그어가며 완독한 후 정리한 평론 같은 장문의 머리말이었다. 이것만 읽어도 본문을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을 만큼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이었다. 뭐든지 허투루 하는 법이 없는 당신의 성격이 유감없이 드러났다.

언젠가 유럽으로 함께 건축여행을 떠나는 호사를 누렸다. 그 여행이 만족스러웠는지 “근사하다”는 감탄사를 일정 내내 입에 달고 다니셨다. 그런데 파리에서 거대한 볼거리인 노트르담 성당 앞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었다.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우리 일행을 끌고 간 곳은 세계 2차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별로 볼 것도 없는’ 반지하 건물이었다. 땅밑으로 꺼져 있는 계단을 내려갔더니 자그마한 틈으로 어둠이 스며들면서 그 끝 자리가 나타났다. 이곳에서 죽은 자들의 낙서와 산 자들의 버거움이 함께 하는 공간으로 남은 곳이었다. 가로로 길게 뚫어진 창문 너머로 강물이 보였다. 한쪽 벽에 새긴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는 원문을 진지하고도 엄숙한 표정으로 독백처럼 읽어주었다. 그때 느낌은 기록을 남긴 자들의 언어가 아니라 해방둥이로서 냉전시대를 온몸으로 살아 온 당신 세대를 향한 위로와 다짐의 언어처럼 들려왔다.

부고를 받은 이튿날 여명 무렵 빈소를 찾았다. 곡조가 유려하고 청아한 도반 스님과 함께 염불을 해 드렸다. 아침의 고요함 속에서 목탁소리는 더욱 진중하게 내 귓속으로 되울려왔다. 영정 앞에는 성경책이 펼쳐져 있었다. 마지막 날 새벽에도 달려가서 한글 아미타경을 읽어드렸다. 독경이 끝날 무렵 기독교식 발인이 시작되었다. ‘무신론자’(?)로서는 조금 불편한 자리였지만 애도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개의치 않고 자리를 지켰다.

마지막으로 고인의 애창곡 ‘봄날은 간다’를 유족·동료·지인·제자들이 함께 불러주었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흐느낌 속에서, 두 손 모아 “하실 일이 많이 남아 있으니 빨리 이 세상으로 다시 오시라”고 기도했다.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이렇게 오고 있었다.



원철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한문 경전 연구 및 번역 작업 그리고 강의를 통해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하고 있다. 대중적인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의 소통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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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