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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이문열 연재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6-3




일러스트=백두리

혜련의 눈길에서 느껴지는 열기 때문일까, 막상 그런 반문을 받고 보니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그동안 혜련의 염문에 대해서는 이러 저리 들은 게 많다고 생각했는데, 대답하려고 보니 하나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다가 무슨 계시라도 받은 듯 배영기를 떠올리고 호기롭게 받아쳤다.

 “거야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알겠지. 보자 - 그래 우선 비행기 녀석부터.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너희들 그만하면 요란하게 돌아친 거 아냐? 영국에서도 그랬지만, 귀국하고도 한 몇 달 거의 붙어 지내지 않았어?”

 나는 조금도 과장한다는 기분 없이 말해놓고 혜련을 살폈다.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풀썩 웃었다.

 “아하, 그런 게 선생님이 말하는 돌아친다는 거예요? 대본에 작사까지 관심 있는 극작가하고 음악감독이 틈날 때마다 만나 무대에 올릴 작품에 대해 협의하는 거, 한국에서는 그걸 요란하게 돌아친다고 말해요? 그 둘의 성별이 다르면요? 그럼 선생님은 정말 신나게 돌아치셨네. 지난 일 년뿐만 아니라 연극한 지 수십 년 동안 말예요.”

 “야, 연출하느라고 배우들과 만나는 것과 너희 둘 죽이 맞아 밤낮없이 몰려다니는 거 하고 같아?”

 “됐네요. 그동안 참아주느라고 힘드셨겠어요. 그리고 다음은?”

 무엇 때문에 감정이 상했는지 그녀가 뒤틀린 말투로 그렇게 받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에 움찔하면서도 오래 억눌러온 불만이라도 터뜨리는 기분으로 서슴없이 말했다.

 “그 예쁘장한 발레리노는? 가슴 저리게 느껴지는 남자라 했던가? 그 네가 음악을 지휘했던 시립무용단 지젤의 알베르….”

 “역시 연예잡지 가십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네요. 그래요. 그 애를 보면 왠지 가슴이 저려오는 느낌이 있었어요. 뭐, 안고 싶어 했다고 해도 돼요. 하지만 그걸 요란하게 돌아쳤다고 표현하지는 마세요. 통속해요.”

 “그 멋진 교수님은? 해외 명문대 유학파에 유수한 세계 음악 콩쿠르의 수상자. 어떤 스포츠 신문에서는 대놓고 결혼을 전제로 사귄다는 말까지 났다던데.”

 그러는 사이에도 무엇에 충동 받았는지 나는 빠른 속도로 술을 비워대고 있었다. 점차 그 술에 취해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뒤틀리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새 마시기를 그만둔 그녀는 내 그런 어조를 별로 개의치 않았다.

 “으이그, 알겠네요. 그 수준. 알고 보면 선생님도 부드러운 남자 아닌 통속적인 남자네요. 겨우 연예잡지 아니면 스포츠 신문이 주된 정보원(源)이었어요? 이제 방송사 피디에다가 자칫하면 연예기획사 대표까지 나오겠네요. 그러지 말고 선생님 나이에 걸맞은 눈썰미로 살펴봐 주세요. 내 나이 이제 서른다섯이고, 공식적으로 이혼한 지는 벌써 4년째라고요. 게다가 선생님이 잘 아시다시피 결혼관은 평균적인 한국 여자보다 더 평범하고 촌스럽고…. 그런 여자가 갑자기 대중 앞에 끌려나왔을 때 그럴 성싶은 상대로 뭐 짐작되는 게 없어요? 저를 안 지 하루 이틀 되는 것도 아니고, 벌써 이십 년이 넘는데.”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받으면서 다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눈길에 얼큰하게 올라오던 술이 일시에 깨는 듯했다. 성내거나 뒤틀린 기색 대신 알 수 없는 슬픔과 쓸쓸함이 자욱하게 어린 듯했다. 하지만 그런데 약해져서 뒤틀린 심사를 바로 거둬드릴 만큼은 아니었다.

 “아, 그거? 그것도 있지. 네 말대로 같이 잔 애들 말이야. 그때그때 구실이 생겨주어서. 하지만 그런 애들은 네 열중과 몰두의 대상은 아니지 않아?”

 나는 거의 위악적인 기분까지 느끼며 그렇게 받았다. 그러자 다시 그녀의 반응이 격렬해졌다.

 “그러니까 선생님도 전형적인 한국 남자네요. 언제나 배우자로서의 이성과 섹스 처리 대상으로서의 이성을 구분하는 습성. 쉽게 말하자면, 데리고 놀 아이들과 존중하며 함께 걸을 배우자감을 처음부터 철저하게 구분하여 다가드는 태도 말이에요. 나는 적어도 선생님은 거기서 벗어나셨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영 알아듣기 힘드네. 어디나 대강은 그런 거 아냐?”

 “제가 남자들과 잔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해서 오해하신 것 같은데, 사실 제게도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에요. 차라리 그들이 두 종류로 구분되어 있다면 적어도 한쪽과의 관계는 아주 가볍고 손쉬운 일이 되겠죠.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하룻밤 즐기고 다시 안 만날 남자를 고르는 일 말예요. 성적인 기능, 다시 말해 하룻밤 나를 성적으로 만족시켜줄 상대인가 아닌가만 살피면 될 테니…. 하지만 실은 그렇지가 못해요. 제게는 모든 만남이 무색이고, 그래서 같은 의미와 기능을 가지게 되죠. 모든 만남들은 선택의 시작일 뿐, 미리 선택한 뒤 만나지는 않아요. 아니 애초에 그런 구분이 없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갑자기 내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절로 목소리가 움츠러들었다.

 “그런데 그게 어떻다는 거야?”

 “나는 지난번 이혼을 그저 성장 배경이 되는 문화의 차이가 가져다 준 불행이라고 여겼어요. 그런데 이번에 와서 보니 그게 아녔어요. 또 이국정취라는 것도 순수한 동경의 일종이라고 여기고, 언제든 그것이 자연스러운 감정의 동화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것도 오해였던 것 같아요.”

 “그럼 뭐였어?”

  “바로 그 한국적 사고의 습성. 그것이 문화의 차이를 이간 확대시키고, 순수한 동경을 비열한 수단으로 타락시켜요. 말하자면 다른 문화 혹은 이국정취란 것은 자기정체성이나 로컬리티에 가외로 얹힌 기회 같은 것으로 여겨, 함께 조화를 이루고 절충과 종합의 미덕을 지향하기보다는 잠시 그 이질성을 즐기려고 들 뿐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여자에게도 적용되어, 처음부터 나는 동등한 인격의 배우자감으로보다는 기회가 닿으면 한번 데리고 놀고 싶은 여자로만 인식되는 거죠.”

 거기서 비로소 나는 자신 있게 끼어들 틈을 본 사람처럼 말했다.

 “나도 남자지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근대사가 강요한 열등감일 테지만 우리 한국 남자들은 코카서스 인종적인 외모에 특히 취약하지. 한번 데리고 놀 생각으로 백인 여자에게 덤벼드는 경우보다는 여왕처럼 모실 터이니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가 더 많을걸. 너야말로 뭘 오해한 것 같은데.”

 “그 열등감이란 거 나도 알아요. 하지만 그게 그들의 습성을 바꾸어 놓지는 못해요. 함께 침대에 들 때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황송한 기색이죠. 섹스를 마치고도 그 기분은 그대로인 것 같더군요. 황송하고 황송한 일이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그들과 자고 난 다음이면 반드시 느끼게 되는 이상하게 황폐한 느낌은 어쩌면 그들의 입속에 들어 있는 그 말을 내가 알아들어서인지도 모르죠.”

글=이문열
일러스트=백두리 baekdur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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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