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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겹의 흑연·물감·광택제 … 켜켜이 쌓여 시가 되다




‘살아있는 얼음’ 앞에 서 있는 도윤희 작가. 사물의 이면을 천착해온 그는 “내 안에 있는, 나도 어쩌지 못하는 냉기를 형상화했다”고 밝혔다.


도윤희(50) 작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린다. 혹은 보이는 것의 이면을 그린다.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의 순간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 현상의 이면이 드러날 때 화폭을 붙잡는다. 머리 속엔, 짧은 문장과 이미지가 동시에 떠오른다고 했다. 삶을 은유하는 문장은 나중에 그림의 제목이 된다. 찰나적 이미지와 사색이 만난 시적인 그림이다.

 도씨가 4월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연다. 제목이 ‘언노운 시그널(Unknown Signal)’이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여행 중 강물의 일렁임이 ‘해독하기 어려운 신호’처럼 느껴져, 그를 주제로 작업한 ‘언노운 시그널’을 전시 제목으로 삼았다.

 전시장에서 처음 관객을 맡는 작품은 ‘어떤 시간은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다. 희뿌옇게 퇴색된 화폭 위에 원형의 검은 흔적들이 무리졌다. 강렬한 햇빛 아래 서면 순간 눈 앞이 멀거나 망막에 검은 점들이 떠도는 것을 닮았다. 어떤 밝음도 반드시 어두움을 동반하고 마는 인생의 씁쓸함도 떠올리게 한다.

 옆 그림은 ‘꿀과 먼지’와 ‘먼지 그림자’. 나른한 오후 햇살이 창가를 비출 때 공중에 떠돌며 존재를 드러내는 먼지를 흑백화면에 부평초처럼 그렸다. 부유(浮遊)함, 적막함, 퇴색, 덧없음 같은 키워드들이 떠오른다. “꿀단지를 열어놓으면 금세 먼지가 달라붙는다. 그처럼 좋은 것과 나쁜 것, 빛과 어둠, 인생의 극단적인 것들은 함께 오거나 통한다. 예컨대 어둠은 빛의 응축이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도씨의 그림은 연필로 드로잉을 하고 물감을 칠한 뒤, 다시 수 십 다스의 연필로 덧칠하고 바니쉬(광택제)로 마감하는 지난한 공정을 거친다. 흑연-물감-바니쉬를 60차례나 겹겹이 쌓아 올리기도 한다. 흑연이라는 소재부터가 시간의 축적을 보여준다. 닳고 묻어나는 연필의 느낌, 나무향, 사각거리는 소리가 정신적 카타르시스를 준다고도 말한다. 어린 시절 갖고 놀았던 금박지·은박지를 8년간 햇빛에 부러 그을린 뒤 드로잉하기도 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작가가 처음 시도한 설치작업 ‘언노운 시그널’과 강태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강물을 세로로 탁본한 듯하다”고 평가한 ‘읽을 수 없는 문장’이다. ‘언노운 시그널’은 작가가 직접 찍은 강물 사진의 컴퓨터 픽셀을 다 깨버린 뒤 물감과 연필 작업을 하고 한지에 출력해, 자기만의 기억 속 강물을 형상화한 것이다. ‘읽을 수 없는 문장’은 60겹으로 색의 층을 쌓아 올리고 연필로 작은 점을 찍어 추상성을 더한 대작이다. “내(작가) 안에 있는, 나조차 어쩔 수 없는 냉기”를 예민한 선으로 그린 ‘살아있는 얼음’도 눈길을 끈다. 작가는 ‘백색 어둠’에 대해 “긍정의 감정이 부정의 감정을 몰아내는 새벽의 인상을 담은” 작품이라고 했다.

 시적인 감성이 충만한 제목들에 대해 도씨는 “나는 그림을 그릴 때 마치 글을 쓰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림은 내가 나만의 기호로 쓴 문장과 같다”고 말했다. 또 이번 작업은 “눈으로 보이는 세상의 이면, 현실의 미세한 틈새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고 질문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강태희 교수는 “도윤희 작가는 폭발하는 이미지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극소수의 이미지만을, 그것도 오랜 담금질을 거쳐 세상에 내놓는다. 현상을 심안으로 꿰뚫어 그 실상을 건져 올리려는 집념의 화력이 돋보인다”고 평했다. 02-2287-3500.

양성희 기자

◆도윤희=1961년생. 성신여대에서 회화, 동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했다. 시카고 일리노이 주립대 교환교수를 지냈다. 1995년 ‘제2회 한국미술정예작가상’을 받았고, 96년 환기미술상 한국 측 대표작가 후보로 선정됐다. 스위스 바젤 아트페어의 창시자인 에른스트 바이엘러가 설립해 세계 최고의 화랑으로 꼽히는 바이엘러 갤러리에서 2007년 아시아 작가 최초로 개인전을 갖는 등 세계 화단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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