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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의 시시각각] 우리는 원시인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경북 안동시 도산면에는 ‘퇴계 오솔길’이라는 옛길이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사색하며 걷던 길이다. 요즘엔 탐방로로도 인기가 높다. 그런데 지난해 이맘때 이 길 바로 옆에서 경북대 학술팀이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 것으로 추정되는 공룡 발자국 화석 20여 개를 발견했다. 발자국 길이가 80cm 넘는 것도 여럿이어서 몸 길이 10m, 높이 4m 덩치의 공룡들이 남겼을 것이라고 한다. 2008년에도 근처에서 공룡 발자국들이 발견된 적이 있다.



 가슴이 뛰지 않는가. 조선 최고의 학자가 다니던 산책로가 1억 년 전엔 공룡들의 놀이터·사냥터였다. 공룡들이 휘젓고 다니던 길을 16세기에 퇴계가 천천히 걸어다녔고, 다시 후손들의 발길을 이어지고 있다. 시간만 다를 뿐 공간은 같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국토 풍경과 온갖 문명의 이기(利器)들이 실은 아주 최근에야 생긴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깨달음이다.



 원래 없던 것을 마치 있었던 양 너무 당연시했다는 사실을 대지진 취재차 일본에 1주일 머무르면서도 느꼈다. 묵고 있던 호텔방은 시도때도 없이 흔들렸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1주일간 규모 5.0 이상 여진이 300여 회 일어났단다. 처음엔 침대가 흔들리다가 곧 건물 전체가 좌우로 흔들렸다. 달리던 지하철은 갑자기 멈춘다. “지진이 나서 안전점검을 하고 있으니 잠시 기다리라. 차내가 안전하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다시 출발하기까지 15분 동안 여러 가지 잡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며칠 전엔 도쿄의 수돗물까지 방사능에 오염됐단다. 수도 역시 ‘원래’는 없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수돗물 역사는 불과 103년이다.



 사람이 자연 앞에서 뽐내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될까. 일본이 지진에 폼을 잡은 것은 아니지만, 미처 상상하지 못한 엄청난 위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인간의 몸뚱이라고 별 게 아니다. 공룡은 약 6500만 년 전에 멸종했다. 새로 진화해 하늘로 날아간 공룡들만 살아남았다. 사람속(屬)이 지구상에 등장한 것은 250만 년 전으로 친다. 현생인류는 18만 년 전 나타났다고 한다. 진화는 느리게 진행되는데 근대 이후 인간의 의식주 양태는 급속도로 변했다. 몸은 그대로고 생활환경만 변했다. 오늘날에도 밀림 지역에서 옛날처럼 수렵·채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평범한 미국인보다 하루에 20~30km를 더 걷는다. 선진국에서 많이 나타나는 알레르기도 변한 생활환경 탓으로 보는 이가 많다. 벌레·박테리아·오물 등 ‘오랜 친구들’과 동거하던 시절에 형성된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너무 깨끗해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일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래서 아마존강 지역 인디언들은 88%가 기생충에 감염됐지만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독일인들은 이와 정반대였다(『우리 몸은 석기시대』, 데트레프 간텐·틸로 슈팔·토마스 다이히만 공저, 중앙북스). 생명체에 암수, 즉 남성과 여성이 생긴 것도 무려 10억 년 전이라고 한다. 유성생식을 채택한 덕분에 생물은 멸종되지 않았고, 오늘날 인간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전직 고위 공무원과 학력 위조 여성 간 스캔들도 이런 끈질긴 진화 과정에서 불거진 춘사(椿事)로 여기면 차라리 속이 편하다.



 그러고 보면 남에게 함부로 “짐승만도 못하다”거나 “근본 없는 자”라고 욕할 게 아니다. 우리는 모두 원시인 속성을 갖고 있으니까. 수성(獸性)은 인간 속성의 커다란 부분이고, 인간의 근본은 저 먼 원시시대에 있으니까.



 지난 주말 귀국한 뒤 ‘원래 없던 것들’에 대한 고마움에 젖어들었다. 스위치를 올리니 전깃불이 들어왔고, 꼭지를 틀면 더운 물이 콸콸 나왔다. 이것들이 한순간에 없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 안 하던 걱정이 쏟아졌다. 당연하고 사소해 보이던 주변 것들이 새삼스럽고 대견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은 1만 년 전엔 없어 걱정, 오늘날엔 있어 걱정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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