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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의 세상읽기] 매뉴얼 사회의 함정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아직 벚꽃도 피지 않았는데 올해 10대 뉴스의 절반은 다 나온 것 같다. 중동 사태에 일본 대지진, 리비아 전쟁까지 ‘빅 뉴스’들이 쓰나미처럼 쏟아지고 있다. 각 언론사 국제부 기자들이 익사(溺死)할 지경이다. 구제역 사태, 상하이 총영사관 스캔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다. 한국 언론의 쏠림 현상을 탓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는 큰 뉴스들이 워낙 많은 것이 사실이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기사를 선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뉴스가 들어올 때마다 그 의미와 맥락을 따져 경중(輕重)을 가리는 것은 피를 말리는 작업이다. 혹자는 그래서 매뉴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각종 경우의 수를 상정해 미리 만들어 놓은 매뉴얼의 도움을 받으면 작업을 수월하게 하면서도 실수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뉴스의 가치는 상대적이다. 아무리 큰 뉴스가 있어도 그보다 더 큰 뉴스가 들어오면 밀릴 수밖에 없다. 뉴스 가치를 따지는 일차적 책임은 담당기자와 데스크의 몫이고, 최종적으로는 편집국장이나 보도국장 같은 제작 책임자의 몫이다. 뉴스 가치 판단에는 그들의 지식과 경험, 가치관과 세계관이 녹아 있다. 뉴스는 많고, 판단은 사람마다 다르다. 신문 지면이나 TV 화면에 반영된 최종 결과로 따지면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가 가능하다. 이를 매뉴얼화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중요한 것은 리더의 안목과 직관이다.









[일러스트=강일구]






 대지진과 쓰나미로 삶의 터전을 잃거나 방사능 공포 때문에 집을 나와 피난소에서 생활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아직도 35만 명이다. 학교 교실이나 강당 같은 임시 대피소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는 그들을 TV로 볼 때마다 한편 안타깝고, 한편 답답하기 짝이 없다. 저체온증으로 숨지거나 의약품 공급이 안 돼 목숨을 잃은 노인들도 여럿이다. 고통 속에서도 묵묵히 참고 기다리는 일본인들의 자세는 감동적이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어떻게 세계 3위의 경제대국, 방재(防災) 선진국 일본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지진 때문에 도로가 끊기고, 차량을 움직일 연료가 모자라 구호물자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 많은 헬리콥터는 두었다 어디다 쓰는가. 도로가 문제라면 구호품을 실은 대형 선박을 피해지역 해안으로 급파해 헬기로 투하하면 될 것 아닌가. 문제는 그런 생각을 못 해서가 아니라 일본 정부와 지자체의 재해 대책 매뉴얼에 헬기를 이용한 구호품 투하는 없다는 것이다. 기가 막힌다.



 멀쩡한 도로를 두고도 지자체가 발행하는 긴급통행증이 없어 구호물자와 유류를 실은 트럭이 며칠씩 발이 묶인 것도 매뉴얼대로 하다 보니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태 초기에 바닷물을 끌어다 원자로를 냉각시킬 엄두를 못 낸 것도 매뉴얼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의 불호령으로 바닷물을 동원했지만 매뉴얼에 얽매이다 금쪽같은 시간만 허비한 꼴이 됐다.



 요즘 일본 정부 당국자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상정외(想定外)”의 사태라는 말이다. 일본말로 “소테가이”다. 이 정도 규모의 지진과 쓰나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대응책이 매뉴얼에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 매뉴얼대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만도 그런 오만이 없다. 세상에는 인간의 예지(豫知)에서 벗어난 일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인간의 머리로 대자연의 심술까지 다스릴 순 없는 노릇이다.



 매뉴얼은 물론 필요하다. 교육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매뉴얼을 멀리하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매뉴얼에 의존하는 것도 문제다. 매뉴얼에 매달리는 것은 나쁘게 말하면 면피주의다. 예기치 못한 사태를 만나 자기 책임하에 위험을 감수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가 “나는 매뉴얼대로 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통상적인 경우라면 매뉴얼대로 하면 되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다르다. 대지진과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매뉴얼만 붙들고 있는 것은 무책임한 보신주의다. 결국은 관료주의의 문제고, 리더십의 문제다.



 일본의 기성세대는 요즘 일본 젊은이들이 패기와 도전정신을 잃었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기성세대다. 그들이 만든 매뉴얼 사회의 함정에 갇혀 젊은이들이 의욕과 패기를 잃고 있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 매뉴얼대로 돌아간다면 그처럼 재미없는 세상도 없을 것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사태에 맞서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는 것이 가치있는 삶이고, 의미있는 삶이다.



 일본은 패전으로 거듭나 선진국이 됐고, 경제대국이 됐다. 그러나 20년 전부터 일본은 침체 상태다. 3·11 대지진으로 일본이 다시 한번 거듭나길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려면 우선 ‘매뉴얼 원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 일본에 필요한 것은 안목과 직관을 갖춘 리더의 결단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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