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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으로 돌아갔다 꺾지 못할 팀이 없었다

대한항공 신인선수 곽승석(가운데)이 KEPCO45와의 경기에서 타점 높은 스파이크를 터뜨리고 있다. [중앙포토]
2011년 3월 6일은 한국 배구사에 남을 날이다. 2005년 프로배구가 출범한 뒤 처음으로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이 아닌 제3의 팀이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다.

만년 3위 대한항공 배구단, 첫 우승 비법은

민영 배구단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항공이 그 일을 해냈다. 만년 3인자의 수모와 비아냥을 감내하고 끈질기게 도전해서 이룬 대업이다. 배구단이 직원들의 사기를 오히려 꺾어 놓는다는 질책도 있었고, 물량공세로 지름길을 가자는 요구도 빗발쳤지만 항공사 특유의 뚝심과 기본에 충실하는 철학으로 부딪혀 진정한 승리자가 됐다.

대한항공은 현존하는 민영 배구단 중 가장 오래된 팀이다. 69년 해군팀을 인수해 대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배구단을 창단했다. 60년대까지 한전과 육군보안사·육군경비사 등 국영기업체나 군 배구팀 위주로 명맥을 유지하던 실업배구는 대형 민간기업인 대한항공이 뛰어들면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창단 역사 가장 긴 민영 배구단
대한항공은 높이 솟구쳐 오르는 배구의 종목 특성이 항공사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진다는 판단에 따라 그룹 차원에서 전폭 지원했다. 창단 첫해 실업연맹전과 MBC배, 종합선수권대회를 석권했다. 73년 오일쇼크의 직격탄을 맞으며 해체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86년 재창단에 성공했고, 2005년 프로출범에 동참하면서 최고(最古) 팀의 정통성을 이어왔다.

대한항공 신영철 감독이 지난 10일 우승 축하 행사에서 선수들로부터 헹가래를 받고 있다.
하지만 한번 날개가 꺾인 대한항공은 재이륙을 한 지 25년이 된 지난해까지 한 번도 최고로 날아오르지 못했다. 94년까지 최고 권위 대회였던 대통령배에서 3위 이상의 성적을 내지 못했고 95년 시작된 슈퍼리그에서도 99년 2위를 차지한 게 최고 성적이었다. 최천식-한장석-박희상 등 대를 잇는 스타플레이어를 보유했지만 현대자동차써비스(현대캐피탈 전신)와 고려증권, 현대캐피탈과 삼성화재의 라이벌 전선을 한 번도 깨지 못했다.

95년부터 배구단을 지키고 있는 지승주 차장은 “당시에는 선수에 대한 투자나 지원이 다른 팀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고 시인했다. 한진그룹 재단의 인하대 출신 선수 위주로 팀을 구성하다 보니 경쟁 의식이 떨어졌다. 선수에서 은퇴하면 남부럽지 않은 항공사 직원으로 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수로 최고가 돼야 한다는 동기부여도 부족했다.

그 바람에 배구단의 존재 이유에 의문이 제기돼기도 했다. “직원들 사기만 떨어뜨린다”는 불만이 나왔다. 신문에는 ‘대한항공 끝없는 추락’ ‘대한항공 불시착’ 등 큰일날(?) 제목이 뽑히기도 했다. 이유성 단장은 “스포츠는 성적으로 말해야 되는데 결정적일 때 매번 져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직원 사기 떨어뜨린다” 비난 받기도
그러나 대한항공은 국내 1위 항공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배구단을 접지 않았다. 오히려 프로화가 되고 나서는 공격적으로 투자했다.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신영수·강동진·김학민·한선수 등 정상급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조양호 회장이 대한탁구협회장 및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장에 취임하는 등 체육계 전면에 나서면서 배구단에 대한 투자도 더욱 화끈해졌다. 2007년 건축비로만 60억원을 들여 최신식 전용체육관을 지어줬고 자사 항공기를 이용해 해마다 미국과 일본 전지훈련을 시행했다.

하지만 몸에 밴 패배의식이 하루아침에 지워지지는 않았다. 2007~2008시즌 내내 삼성화재와 1위 경쟁을 펼쳤으나 막판 고비를 넘지 못하고 첫 2위에 만족해야 했다. 3위 현대캐피탈과 플레이오프에서는 3차전 3세트 11-2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역전패해 챔피언결정전에도 오르지 못했다. 2009~2010시즌에도 중간까지 1위를 달리다 막판 주전들의 줄부상으로 3위로 떨어졌지만 신영철 감독대행을 정식 감독으로 임명해 전권을 맡겼다.

신 감독은 이번 시즌을 앞두고 공격에만 맛들인 선수들에게 수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데 주력했다. 주포 강동진이 입대해 공격력 약화가 우려됐지만 신인 드래프트에서 수비가 좋은 곽승석을 지명해 팀 내 최다득점자 신영수 대신 주전으로 내보내는 결단을 내렸다. 외국인 선수도 화려한 공격보다는 착실한 플레이가 돋보이는 에반 페이텍을 택했다.

리시브 및 수비 훈련만 반복적으로 했지만 선수들은 묵묵히 따랐다. 오히려 훈련이 없는 시간에도 자발적으로 나와 리시브 보강 훈련을 했다. 주전 자리를 뺏긴 신영수도 “감독님만 믿는다”며 기꺼이 백업 공격수 역할을 수행했다. 신 감독이 매일 선수들과 면담하며 마음을 먼저 움직였기에 가능했다.

올 시즌 개막 후 대한항공은 8연승을 달리며 돌풍을 일으켰다. 기본이 탄탄하게 다져진 팀은 연승이 끊기고 체력이 떨어져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세트당 리시브 10.629개, 디그 10.598개로 수비 1위를 기록했다. 베테랑 리베로(수비전문선수) 최부식은 디그(스파이크를 받아내는 것)와 수비 부문 1위를 차지하며 리베로로서는 드물게 올스타 팬투표에서 최다득표를 했다.

최고의 착륙 위해 샴페인 파티 미뤄
수비가 좋아지자 세터 한선수의 토스도 날개를 달았고, 공격수 에반과 김학민이 공격순위 4위와 9위에 그쳤음에도 다양한 공격루트로 팀 공격종합 1위에 올랐다. 뿌리 깊었던 패배의식을 자신감으로 바꾼 대한항공은 한 번도 1위를 놓치지 않고 완벽한 레이스를 펼쳤다. 86년 재창단한 지 25년 만에 마침내 가장 높은 곳까지 날아올랐다.

그룹 직원들의 사기도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자발 응원이 뿌리내리면서 시즌 중반부터는 응원단을 꾸릴 필요가 없어졌다. 이 단장은 “그동안 직원들에게 패배감만 심어줬던 것이 너무 미안했는데 이번 정규시즌 1위로 어느 정도 마음의 빚을 갚은 것 같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조양호 회장은 지난 2일 대한항공 창립42주년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하면서 가장 먼저 배구단의 성과를 치하했다. 조 회장은 “배구단이 특출난 스타는 없지만 탄탄한 조직력을 앞세워 좋은 성적을 냈다. 배구단처럼 모두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자”는 요지의 기념사를 했다. 주장 장광균은 배구단 소속으로는 처음으로 모범사원상을 받았다.

하지만 선수단은 “기뻐하고 있을 때만은 아니다”며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 챔피언결정전에서 최종 승리를 한 뒤에 샴페인을 터뜨리자며 최고의 착륙을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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