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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 문인들 구속-해직, 한편선 신군부 찬양 글

1980년은 새로운 10년을 여는 희망찬 첫 해가 되지 못했다. 지난해의 12·12 쿠데타로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이 나라의 미래가 어떤 모습을 갖추게 될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3월에 접어들면서 계엄해제 민주화 등을 요구하는 전국 대학생들의 시위는 갈수록 격화됐고, 상대적으로 국가권력을 통째로 장악하려는 신군부의 계획은 구체적으로 진행됐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상황은 70년대의 유신 시절보다 오히려 더 혹독한 측면이 있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80년대 <1>

70년대 중반부터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이하 자실)’를 중심으로 반체제 저항운동을 벌여온 문인들도 정세의 흐름을 지켜보며 관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민주화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으나 그 해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동시에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이 터지면서 그 기대는 산산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관련자로 긴급 구속된 30여 명 가운데 대다수가 교수·종교인·언론인·학생 등 재야 인사들이었고 특히 이호철·고은·송기원 등 현실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던 문인들까지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1980년 7월 31일 정부는 사회정화작업의 일환으로 주간지등 172개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취소했다. [중앙포토]
이호철과 고은은 ‘자실’의 지도층 문인이었고, 젊은 소설가 송기원은 잡다한 실무적인 일을 떠맡고 있었다. 국제엠네스티 한국위원회 위원장의 직함으로 구속된 한승헌 역시 시와 수필 그리고 평론을 쓰는 문인이었고, 특히 ‘자실’의 고문변호사를 맡고 있었다. 300여 명에 달하는 ‘자실’의 회원은 물론 대다수 문인들은 그들이 줄곧 추구해온 ‘표현의 자유’ 실천운동이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 것임을 예감했다.

그 같은 우려는 7월 말 문화공보부가 ‘사회 정화 작업’의 일환이라며 172종의 정기간행물을 강제 폐간시킴으로써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문제가 있는 정기간행물들이 대다수이기는 했지만 ‘씨알의 소리’나 ‘뿌리깊은 나무’ 등 눈엣가시 같은 잡지는 물론 70년대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던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등 두 계간문예지까지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창비’는 56호를, ‘문지’는 40호를 발행하고 있었다. 항의할 수도, 폐간 조치의 적법성 여부를 따질 수도 없는 살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단의 위기의식이 갈수록 팽배해 가는 가운데, 그해 8월 27일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부터 이듬해인 81년 2월 25일 다시 제12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제5공화국이 출범하기까지 각종 매체에는 몇몇 문인들의 희한한 글들이 잇따라 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축하하고 그 지도자를 찬양하는 글들이었다. 누군가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기도 어려웠겠지만 대개는 새 정치권력의 보이지 않는 압박에 못 이겨 쓴 글들이었다.

스타트를 끊은 사람은 신진 여류작가 강유일이었다. 강유일은 전두환의 제11대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거행된 ‘전두환 대장 전역식’의 참관기를 한 신문에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전두환이 ‘두려운 절망의 늪으로부터 국민을 구해냈다’고 칭송하고 릴케의 글을 인용해 이 여름이야말로 ‘위대한 여름’이었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뒤이어 중진시인 조병화는 전두환 대통령 당선 경축시를 발표했고, 제도권 문단의 구심체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조연현은 전두환 대통령 취임사를 듣고 난 소감을 썼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조연현은 취임사 가운데 ‘문화예술인의 자주적이며 창의적인 활동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대목에 깊은 공감을 나타내면서 제5공화국이 우리 민족문화 발전의 초석을 다질 것이라 기대했다.

이듬해인 81년 초 제12대 대통령 선거전이 시작되면서 서정주는 투표 이전에 이미 당선이 확실했던 전두환 후보의 찬조연설에 ‘동원’됐고 당선 후에는 ‘당선 축시’를 발표했다. 서정주는 그 후에도 87년 1월 전두환 대통령이 생일을 맞았을 때 한 신문에 ‘전두환 대통령 56회 생일 축시’를 헌정했다. 이에 대해 문단에서는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일흔두 살을 넘긴 한 나라의 최고 시인이 열여섯 살 아래인 젊은 사람의 생일에 축시를 써 바친 것은 모양새도 좋지 않을뿐더러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이 아니냐’고 입을 모았다.

이호철·고은 등 중견 문인들이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가운데 김현·김치수·염무웅을 비롯한 여러 교수문인들이 까닭도 모르게 강제 해직됐다. 또 월문리에 살던 송기원의 노모가 자식을 기다리다 지쳐 대문 문고리에 목을 매 자살하는 등 문인들의 시련은 계속되고 있었다(송기원 모친의 장례는 근처 발안에 살던 이문구가 상주 노릇을 대신하고 문인들이 조위금을 갹출해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 문단을 이끌고 있는 몇몇 지도층 문인들이 보인 새 정치권력에 대한 그 같은 찬양 행태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이 그 어지러운 시대에 우리 문인들이 보여준 상반된 두 모습이었다.

한데 전두환의 11대 대통령 임기가 시작될 즈음 문단에는 또 다른 소문이 은밀하게 나돌고 있었다. 한 소설가가 전두환의 일대기를 집필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소문이었다. 집필자로 ‘동원’된 소설가가 천금성이라는 사실은 좀 뒤에 밝혀졌지만 그 전기가 완성되면 사례로 수억원을 받으리라는 둥, 장관급의 요직에 앉게 되리라는 둥 온갖 소문이 무성했다. 전두환 전기인 『황강에서 북악까지』가 시중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제5공화국 출범을 약 한 달 앞둔 81년 1월 하순께였다. 부제는 ‘인간 전두환-창조와 초극의 길’이라 되어 있었다. 황강(黃江)은 전두환의 고향인 경남 합천을 의미했고, 북악(北岳)은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의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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