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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유민 추, 옛 고죽국 땅서 고구려 건국 시동

중국 사서엔 고구려 발상 지역이 중국 란하~현재 선양 지역으로 나타난다. 초기 고구려 영역 가운데를 대릉하가 흐른다. 대릉하 상류에는 조양이란 지역이 나타난다. 아침을 뜻하는 조(朝)와 햇빛을 뜻하는 양(陽)이다. 이조양은 우리말로 아사달이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아사는 아침을, 달은 벌판을 의미하는데 조양이 아침해가 뜨는 벌판이라는 뜻이라고 보는 것이다. 사진은 현재의 조양시와 시를 가로지르는 대릉하다. [사진=권태균]
⑦고조선과 고구려
BC 108년 고조선은 멸망했다. 제대로 된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에서 사라졌다. 흉노와 더불어 만리장성 이북을 지배했던 고조선의 붕괴는 거대한 유민의 파도를 일으켰다. 첫 갈래는 고조선 옛터에 남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여에서 유입된 세력들과 함께 고구려를 태동시켰다.

후한서(後漢書)에 “예와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가 옛 조선 지역”(東夷列傳濊)이라 했고 수서(隋書)에는 “고려(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다”고 했다(裵矩傳). 구당서는 “고려는 본래 고죽국이다. 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했다.”(“高麗本孤竹國 周以封箕子爲朝鮮,” 舊唐書裵矩傳)고 한다. 즉 수·당 시대에는 ‘고죽국=조선=고구려’로 파악하고 있다. 고죽국은 현재의 베이징 동부 지역이므로 고구려는 고조선 옛 땅에서 시작된 것이다.

고구려에 대한 최초의 정사 기록은 한서로 “한무제 원봉 3년(BC 108) 조선을 멸망시키고 다음 해 4군을 설치하는데 현도(玄<83DF>)군에 고구려현이 설정되었다”는 것이다. 한서에는 왕망이 말하기를 “하구려(고구려 비칭)는 유주에 속하고 4만5000여 호에 인구는 22만 명”이라면서 그 주석에 “현도군은 과거 진번에 속했고 조선 오랑캐의 나라(地理志下 玄<83DF>郡)”라고 했다.

한사군은 고조선 옛 땅에 설치한 4개 행정구역으로 BC 108년 낙랑·임둔·진번을, 이듬해에 현도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조선시대까지 현도를 현재의 함흥으로 봤다. 그런데 한서에 “현도군은 유주에 속한다…현도군은 고구려, 상은태(上殷台), 서개마(西蓋馬) 등의 세 현”이라고 했다. 유주는 후한 때의 주 이름으로 현재의 베이징~랴오닝(遼寧)성 남부 지역이다. 여기에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라는 수서구당서의 기록을 고려한다면 현도는 결코 함흥이 될 수 없다. 현재의 베이징에 가까운 지역이다. 이를 한서수경주(水經注)가 검증해준다.

한서에 “고구려현의 요산은 요수(遼水)가 나오는바 서남으로 요대(遼隊)
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高句驪 遼山遼水所出 西南至遼隊入大遼水.”(地理志 玄<83DF>郡)라고 한다. 수경주에 따르면 대요수와 합류하는 백랑수(白狼水)는 교려(交黎)를 지나는데 이곳이 바로 창려(베이징 동남)다.

문제는 요수를 달리 요하(遼河)라고도 하고 고대에는 상류를 낙수(樂水), 하류를 대요수라고도 했다는 점이다. 수서에 “요산은 북위가 요양(遼陽)이라고 했는데 … 개황 16년(596) 요주에 속했다(遼山后魏曰遼陽 … 十六年屬遼州)”고 했다. 요양은 현재의 선양(瀋陽) 또는 랴오양(遼陽)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현도군 고구려현의 위치는 현재의 란하(루엔허)에서 선양 가운데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한서의 현도군에 관한 주석으로 “과거에는 진번군으로 조선 오랑캐(朝鮮胡)의 나라이고 고구려(高句驪)현은 구려 오랑캐(句驪胡)다”(地理志下 玄<83DF>郡)라는 기록과 위략(魏略)의 “연나라 사람 위만이 오랑캐의 옷(胡服)을 입고”라는 기록을 보면 중국이 고구려와 조선을 동일 계열의 호(胡)로 보고 있음이 나타난다. 이를 동이(東夷)라는 개념과 결부시키면 동호(東胡)라는 보통 명사가 도출된다. 중국에서 호(胡)는 일반적으로 흉노(匈奴)를 말한다.

고조선 멸망 후 전한 시대(BC 202∼AD 7)를 통틀어 고구려에 대해 제대로 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즉 고조선이 무너지고 100여 년 뒤인 AD 1세기 초까지도 고구려는 건국되지 않고 한나라의 자치현(自治縣)과 같은 형태로 있으며 압박을 받고 있었다.

한서에는 “(AD 12년) 왕망(王莽)이 고구려를 징발하여 오랑캐들을 정벌하려고 하였는데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고구려인들을 강박하자 오히려 요새 밖으로 달아났다. 나라의 법을 범하고 도적질을 일삼자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 오히려 피살되었다. 주군(州郡)에서는 이 모든 책임이 고구려후(高句麗侯)인 추(騶)에 있다고 하였다…예맥이 큰 반란을 일으키자 엄우(嚴尤)에게 명하여 이들을 정벌하게 하였다. 엄우는 고(구)려후 추(騶)를 유인하여 오게 한 후, 머리를 베어 장안에 전하였다”(王莽傳)라고 한다.

추(騶)는 한편으로는 명목상 한나라의 제후였지만 북방 세력(흉노)과도 긴밀했기 때문에 중화 편집증을 가진 왕망(신 황제)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다. 추가 왕망의 요구를 거절한 것은 고구려가 정상적인 정벌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한 세력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추는 한나라의 위계에 빠져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 사건은 고구려 자치현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으며 민족적 각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이 ‘추’가 후일 ‘주몽’의 이름을 빌려 신격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기록상 기원 전후로 추(騶)를 제외하고는 고구려의 건국 시조에 해당되는 어떤 실존 인물도 없기 때문이다. 주몽·추모(鄒牟) 등은 ‘추(騶)’의 전음으로 추정된다.

양서(梁書)에는 “(서기 32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하였고 이때 비로소 고구려왕을 칭하였다”(高句麗傳)라고 한다. 즉 대무신왕 12년경에 왕을 칭했다는 것이므로 고구려는 바로 이 시기에 서서히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 삼국사기에는 태조 대왕(53~146)을 국조왕(國祖王), 즉 건국 시조라 하는데 이것은 바로 이 시기에 고대국가의 면모를 일신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만 태조왕의 생몰연대(97세 서거)가 당시 상황으로 보아 상식적이지 못하므로 여러 왕들의 업적을 통합해 이를 건국 시조화한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고구려 전문가인 서울대 노태돈 교수는 “삼국사기의 건국신화는 4세기 소수림왕(371∼384) 때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부여계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확립됐다. 이때 고구려 초기왕계도 함께 정립됐을 것이다. 소수림왕은 고구려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과 귀족들을 결속시켜, 왕실을 중심으로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시조에 대한 신성화 작업을 강행했을 것”이라고 한다.

고구려는 같은 계열인 부여계를 정치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부여계의 신화를 흡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신화는 부여 신화의 복사판이다. 삼국사기에 “동부여왕 해부루가 죽고 금와(金蛙·금개구리)가 즉위하였는데, 이때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났다…어느 날 유화는 햇빛을 받고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에서 남아(男兒)가 나와 성장하니 이가 곧 주몽이다”(고구려 본기)라 한다. 이 신화에는 ‘햇빛에 의한 회임’과 ‘금와왕’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코드가 숨겨져 있다.

첫째, ‘햇빛에 의한 회임’과 관련된 이야기를 갖고 있는 실존 인물은 기록상 동호의 영웅 단석괴(檀石槐)가 유일하다. 삼국지에 “흉노의 한 제후가 3년 전장에서 돌아오니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 제후는 아이를 죽이려 했다. 아내가 ‘낮에 천둥소리가 들려 하늘을 보니 번쩍이는 빛이 입에 들어와 임신하여 출산했으니, 이 아이는 필시 크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제후가 안 믿으니 아내는 친정집에 아이를 보냈다. 아이는 자라면서 기골이 크고 용맹할 뿐 아니라 지략이 뛰어나 부락이 그를 경외하고 복종하여 마침내 부족장으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단석괴는 선비족(동호의 후예)의 영웅으로 현재의 허베이(河北)에서 둔황(敦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지배자였다. 고구려는 장렬히 산화한 고구려후 추의 일생을 존숭하여 동호의 영웅인 단석괴의 출생신화에 부여계의 신화를 흡수, 북방 패자임을 과시하기 위해 신화를 강화한 것이다.

둘째, 고구려와 부여의 원뿌리가 되는 나라의 왕을 금와왕(金蛙王)이라고 한 부분이다. 금와왕(금개구리왕)은 알타이인의 시조다. 알타이에 퍼져 있는 알타이인의 아버지, 탄자강 설화는 “옛날 알타이에 탄자강(개구리왕이란 뜻)이란 노인이 살았는데 하루는 붉은 개구리와 싸우던 흰 개구리를 구했다. 이 일로 그는 소원을 들어주는 댕기를 선물로 받아 부자가 되고 꾸르부스탄(하늘의 신)의 막내딸을 아내로 맞는다”(양민종 알타이 이야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여의 기원이 바로 알타이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알타이 지역의 민담과 설화는 1940년대 러시아 민속학자 가르프와 쿠치약 등에 의해 집중적으로 채록되었는데, 알타이 지역은 콩쥐팥쥐 우렁각시 나무꾼과 선녀 혹부리 영감 심청전 등의 원산지다. 이 가운데 나무꾼과 선녀는 만주족의 건국신화다. 물론 부여·고구려의 신화가 거꾸로 알타이로 넘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향후 연구 과제다.

위략(魏略)에 “옛날 북방에 고리(<69C0>離)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시녀가 말하기를 닭 알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동명(東明)인데 활을 잘 쏘았기 때문이다… 이후 동명은 수도를 건설하고 부여를 다스렸다”(三國志 魏書 扶餘傳 주석)는 기록이 있다. 부여는 바로 고리국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이어 삼국지(三國志)에 “고구려는 북으로는 부여에 접하고 있다… 동이들이 과거에 하던 말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으로 언어라든가 다른 대부분의 일들이 부여와 같다고 한다”(魏書 高句麗)라고 했다. 부여세력 일부가 고구려 건설에 합류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부여계→고구려’라는 역사의 흐름이 생겨난 것이다.

위략에 나타나는 고리(<69C0>離)는 이후 고리(高離:삼국지(三國志)), 고리국(藁離國), 탁리(<69D6>離:논형(論衡)), 삭리(索離), 콜리(忽里: Khori), 고려(高麗), 구려(句麗), 고구려(高句麗) 등으로 나타난다. 사기당서(唐書: 940) 당운(唐韻: 751) 또는 명나라 때의 정자통(正字通: 1671)에서 ‘려(麗)’라는 글자의 발음은 ‘[리(li)]’로 난다. 따라서 대체로 위의 발음은 ‘까오리’에 가깝다.
고구려는 요동에서 한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한편 부여로 세력을 확대했다. 동시에 추의 죽음을 기리고 거기에 부여와 단석괴 신화를 결합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은 것이 고주몽의 건국신화라고 볼 수 있다. 고조선이 사라진 옛터에, 고주몽으로 환생한 고구려왕 추(騶)의 수급(首級)이 흘린 혈흔(血痕) 위로 새로운 역사의 꽃이 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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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