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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들은 행복합니까”

일전에 심리학자 몇 분과 학술모임을 할 때 받은 질문이다. “판사들은 행복합니까?” 사람들의 곤경과 불운 한가운데에서 일하는 직업인으로서 그리 행복할 수만은 없으리란 호기심의 발로였다.
과연 일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어느 날 재판을 마치고 선고한 형량을 합해 보니 족히 100년은 넘었다. 사형 선고가 쟁점이 된 사건도 있었으나 무기징역에 그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사건 기록에 등장한 참혹함에 며칠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날 법정구속도 여러 건 했다. 원하는 선처를 받지 못하고 돌아서는 피고인들의 원망 어린 눈초리에 마음이 마냥 먹먹했다. 이렇게 사람을 잡아 가두고도 두 발 뻗고 편히 잠을 청하기엔 심장이 강하지 못했다. 필경 업을 쌓는 일일 게다.

남을 무고했다는 아주머니 재판이 있었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재판 내내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피력했다. 다만 재판부의 판단으론 유죄 증거가 충분했다. 유죄가 인정된다면 그 무고는 매우 고약한 처사라 하겠다. 법정구속 실형을 선고하는 자리에서 유죄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 드렸다. 구속 사실을 알려줄 가족의 주소를 재확인했다. 석방될 수 있는 절차도 안내했다. 상소심에서 잘 대응해 억울함 없는 재판을 받으라는 당부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재판 과정에서 보인 태도와는 달리 막상 실형을 선고받는 자리에선 오히려 고분고분해진 게 의외였다.

형 선고를 받고 돌아서는 그녀를 교도관이 붙잡아 구치감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어머 왜 이러세요!” 외마디 비명에 이어 그녀는 그제야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나 보다. 울부짖음의 여운 뒤로 구치감 문이 꽝 닫혔다. 아아, 이게 무슨 일이람. 그녀는 15분간에 걸친 설명을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요령부득 소통 부재의 내 재판 기술을 안주거리로 자책의 소주병을 꽤나 비웠던 것 같다.

그 무렵 알레르기 치료차 어느 종합병원을 찾은 일이 있었다. 그 병원의 모토는 ‘잘 설명하는 병원’. 등에 수십 개 바늘을 꽂아 원인을 진단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 일을 담당한 분은 너무나 상냥하고 친절했다. 재판도 일종의 서비스 사업임을 자각하게 된 마당이라 그러한 친절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자원봉사도 하지 않나요? 전 지금 같은 일을 하면서 월급까지 받고 있는데요. 이 직업에 감사하고, 그래서 즐거울 뿐이에요.” 눈물이 찔끔 나왔다. 찌르는 바늘 끝의 따끔함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수십 년간 성인 발달 종단연구를 수행해 오고 있는 하버드대 의과대학의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 그의 저서 행복의 조건에서 품위 있고 행복한 성숙(노화)의 요체인 긍정적 방어기제의 하나로 이타주의를 들고 있다. 이타주의는 자신이 받고 싶은 것을 남에게 베풂으로써 즐거움을 느끼는 것. 이 대목에서 자신의 직업을 이타성과 관련 있는 것으로 여기고 거기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직업적 만족과 성취감, 일과 즐거움의 합일, 행복한 인생 성숙과 자아실현, 타인과 이 세상에 대한 행복감의 전파. 그때 병원에서 만난 젊은 여직원의 함축적 촌철살인 속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계절은 돌아 어김없이 봄을 가리킨다. 풀린 날씨에 공원에는 가족 동반 산책객들이 늘었다. 아이들의 경쾌한 발놀림, 사람들의 미소에 담긴 행복감은 내게 전염된다. 저분들의 행복한 봄날을 지켜줄 안전망의 한 축에 몸담고 있음에 생각이 미치자, 어느새 뿌듯한 책임감이 몰려온다. 사바 세계 번뇌와 오니(汚泥) 속에서 나약한 인간이 감당하기엔 때론 과중하더라도 아침 햇살 속에서 피어날 연꽃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지킴이 일을 소중하게 여기자. 비록 어리석지만 이 일로 인해 인생 바닥의 고통과 질곡에 시달리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희망과 구원의 빛을 보여드릴 수 있다면 그에 감사하자. 새들의 지저귐, 바람 냄새, 신록의 낌새를 온몸으로 느끼며 이시형 선생의 세로토닌 걸음을 걷다가 행복한 깨달음을 얻는다. 군자의 배움은 한 사람의 인격과 가치관에 변화를 가져다 주고 나아가 타인과 사회에 아름다운 변화를 가져온다는 가르침을 되새긴다.

또 하나의 행복감이 있다. 귀중한 지면을 허락 받아 주제넘은 글을 1년여간 써왔다. 이제 글 쓰는 어려움을 내려놓는 시점에 이르러 자족의 해방감도 느낀다. 질책과 격려를 해주신 독자 여러분들, 우리 사회의 행복한 전진을 위해 신선한 시도를 거듭하고 있는 중앙SUNDAY 관계자들께 머리 숙여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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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