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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전세난









옛날에는 서울에 벼슬 살러 오면 대부분 셋집에 묵었다. 퇴계 이황(李滉)도 “서울 셋집 동산 빈 뜰에/해마다 온갖 나무 붉은 꽃이 피누나(漢陽賃屋園院空/年年雜樹開繁紅)”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정원까지 있는 이런 좋은 셋집은 드물었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은 “때로 셋집에서 쫓겨나/동서로 자주 떠돌아다녔네(有時被驅逐/東西漂轉頻)”라고 읊고 또 “셋집이 시끄럽고 습해서 병이 생겼네(賃屋囂湫病已生)”라고 한탄했다.



김종직은 지인인 임수창(林壽昌)의 명례방(明禮坊 : 명동) 언덕집에 세 들고 나서야 “셋집은 남산 아래 있는데/나귀 타고 출퇴근할 만하구나(賃屋南山下/騎驢堪卯申)”라고 기뻐하고 있다. 오세 기동(奇童)으로 불렸던 이산해(李山海)도 이덕형(李德馨)이 지은 묘지명에 따르면 “일찍 정승이 되었으나 집 한 칸 밭 한 자락이 없어서 항상 셋집을 얻어 살았다”고 전한다. 화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셋집에 사는 경우도 있었다.



서거정(徐居正)이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예문관 제학 조오(趙珸)가 “방위를 피해 셋집에 살았다(避方賃屋)”고 적은 것이 이런 경우다. 임대료는 얼마나 했을까? 선조 때 유희춘(柳希春)은 『미암일기(眉巖日記)』에서 “포육(脯肉) 한 조각과 말린 꿩을 심봉원의 집에 보냈다. 달마다 반찬거리를 몇 번씩 보내니 셋집에 대한 보답이다”고 쓰고 있는데 쌀 1말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는 쌀과 부식으로 집세를 치렀다. 조선 후기 노론 일당독재로 법이 문란해지면서 사대부들이 상민들의 집을 빼앗아 무상으로 사용해 원성이 잦았다. 그래서 영조는 ‘사대부가 상한(常漢 : 상민)의 집을 빼앗아 살면서 처음부터 집세를 주지 않다가 사실이 드러나자 전세문서(貰文)까지 위조해 죄를 면하려 한다(『국조보감(國朝寶鑑)』 영조 즉위년)’며 인심이 착하지 못하다고 한탄하고 있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재상이 셋집에 살다(宰臣賃屋)’란 글이 있다. 이 글에서 이익은 ‘송나라 초에는 재상들도 모두 셋집에 살다가 신종(神宗:재위 1067~1085) 때부터 자기 집을 크게 짓게 되었다’면서 “먼 시골 인재가 조정에 나갈 수 없고, 송나라가 천하를 잃게 된 것도 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현재의 전세난에 정부가 속수무책인 것은 셋방살이의 아픔과 무관한 사람들이 정책을 다루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익의 분석이 옛말 같지 않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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