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중앙시평] 봄, 치유의 판타지아는 들릴까







유재하
UCO마케팅그룹
대표이사




소주 부은 주전자에 오이채 썰어 넣고/ 소주 녹기를 기다리는 동안/ 창밖에선 기어이 첫 봄비가 내린다/ 세상의 뒤틀림이 약간 제자리로 펴지는 기척들/ 멈칫멈칫하다가 다시 펴지는가?/ 저 빗소리 그대에게 들리는가?/ 참말로 들리는가? …… (황동규의 시, ‘첫 봄비’중에서)



 3월, 모처럼 든 햇살로 초등학교 교실 안의 재잘거리는 소리는 더욱 사랑스럽게 들린다. 선생님이 어린 학생들을 향해 물었다 “얼음이 녹으면 무엇이 되지요?” 아이들이 일제히 외친다. “물이 돼요.” 답변은 끝났다. 그러나 구석에서 조용한 후렴구가 들려왔다. “봄이 돼요.”



 봄…. 해빙이 되면 봄은 오는 거다. 아니 해빙이 돼야 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겨우내 움츠렸던 가슴을 펴고 언 땅을 뒤집어 객토를 하며 새 꿈의 씨앗을 뿌릴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첫 봄비가 내려주면 마침내 세상의 뒤틀림도 제자리로 펴지는 기척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위안이 된다. 봄은 그래서 기대와 위안의 계절이다.



 이런 기대와 위안은 판타지라는 장르를 만들어 냈다. 현기증이 날 만큼 빠르게 변하는 세상, 스마트기기로 무장하고 수많은 팔로어를 두었어도 돌아보면 혼자만 미아가 된 듯한 외로움, 따라잡을 수 없는 빈부의 양극화 속에서 반전을 꿈꿀 수 없는 얼음과 같은 현실에 대한 대리만족을 위해서 판타지는 태어났다. 차가운 겨울을 지나 따뜻한 봄으로 가고픈 욕망을 대신해준 것이다. 그리고 판타지가 봄에 어울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판타지는 그리스어 phainein에서 유래됐으며 이 뜻은 ‘눈에 보이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즉 판타지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봄’이 ‘보다’에서 유래된 것이란 해석과 비교해 보면 봄과 판타지는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봄에 아직은 보이지 않는 희망이라는 판타지를 기대한다.



 판타지의 영향력은 문화·예술 속에서만이 아니라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하루 3000개가 넘는 광고에 노출되는 우리들은 브랜드 마케터들의 철저히 계산된 판타지에 흥취되곤 한다. 말 타는 서부 사나이의 이미지로 경제공황에 찌든 미국 남성들에게 마초 판타지를 제공했던 말버러 광고캠페인은 이미 고전에 속한다. 모터사이클 브랜드인 할리데이비슨은 그 브랜드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인 호그(HOG·Harley Owner Group)를 통해 소비자 스스로 판타지를 이어가게 했다. 검은 가죽재킷과 호그마크, 그리고 ‘부르릉’이 아니라 야생동물의 ‘으르릉’ 소리를 내며 질주하는 무리들은 특히 중년들에게 잃어버렸던 ‘자유 판타지’의 마력에 빠져들게 했다.



 브랜드 전문가들은 이처럼 소비자에게 브랜드만의 판타지를 제공하기 위해 매 순간 긴장한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자 하는 이상세계는 무엇인지에 대해. 그런데 민생을 책임져야 하는 정부는 국민들에게 어떤 봄의 판타지를 제공하고 있는가. 구제역 사태, 유가 급등에 이어 물가 폭등이라는 위기가 있을 뿐, 길고 긴 한파를 지나 온 국민들에게 전할 희망의 판타지는 보이지 않는다. ‘5% 성장, 3% 물가’라는 정부 목표에 반대로 3월 전체 소비자 물가는 5%까지 올라갈 전망이다. 국민들의 가슴은 해빙은커녕 다시 꽁꽁 얼어붙게 될 것 같다. 가장들은 오른 전세금 때문에 금리 인상이 예고됨에도 불구하고 은행 대출창구 앞에 서야 하고, 학자금 대출로 인해 졸업도 하기 전에 신용불량자가 된 대학생은 2만5000명으로 불어났다. 전년 대비 6, 7%나 급증한 것이다. 이뿐인가. 저축은행 사태로 우리의 노부모는 아직 시린 새벽부터 은행 앞에 줄 서고 있다.



 봄은 오는가. 희망과 함께 치유를 해주는 봄의 판타지는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정·재계와 여야가 모두 통합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 서로 영역 싸움하지 말고, 책임 전가하지 말고, 형식상 모여 카메라만 의식하지 말고 민생을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의식하지 않으면 의식당할 것이다.



 지난 3·1절, 봄의 첫 판타지아는 독도에서 들려왔다. 가수 김장훈과 200명의 원정대가 독도에 닿아 함께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의 사진 한 컷은 아직 해빙이 안 된 우리의 가슴 한편을 녹여주었다. 훈훈해졌다. 그들이 우리에게 따뜻한 봄을 보여줬다. 이제 정치 리더들의 한목소리를 듣고 싶다. 얼어붙은 민생을 녹여주는 치유의 판타지아를!



유재하 UCO마케팅그룹 대표이사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