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서소문 포럼] 엄기영의 염치




박승희
국제부문 차장


나는 한때 그를 좋아했다. 광대뼈가 보이는 얼굴도 좋았다. 무엇보다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힘있는 사람들을 향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고 일갈하면 카타르시스마저 느꼈다. 그는 우리 시대의 인기 있는 앵커였다.

 법적 결격 사유가 없는 25세 이상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시·도지사 후보가 될 수 있다. 1951년생 엄기영 전 MBC 사장이 4월 27일 강원지사 보궐선거에 출마하는 건 그래서 적법하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출마 예정자들 중 지지율이 무려 42.2%(리서치뷰 2일 조사)다. 경쟁 후보와 차이가 제법 나는 1위다.

 그런 엄 전 사장이 2일 강원도 춘천의 한나라당 사무실을 찾아가 입당했다. 역시 법적 하자가 없다. 대한민국 국민은 정당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런데 개운치 않다. 몇 가지 기억이 아드레날린의 원인이었다. 2009년 6월 19일 검찰은 광우병 쇠고기를 보도한 MBC PD수첩 제작진을 불구속 기소했다. 그날 청와대 이동관 대변인은 “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경영진이 사죄하고 총사퇴했을 것”이라고 압박했다. 엄기영은 임원회의에서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람이 언론사 사장 퇴진을 어떻게 말하느냐. 진퇴는 내가 결정할 문제”라고 통박했다.

 여권과 엄기영의 악연은 계속됐다. 한나라당 초선 40명은 나흘 뒤인 6월 23일 집단성명을 냈다. PD수첩과 관련, MBC 최고경영진이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엄기영은 버텼다. 7개월 넘게 버티다가 지난해 2월 8일에야 사퇴했다. 회사를 나서며 그는 노조위원장의 손을 잡고 “정권이 길들이려 할 것이다. 그때마다 비판정신을 늘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그래서였을까. 정치권의 제의가 쇄도했다. 특히 민주당은 몸이 바짝 달았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그를 후보로 영입하려고 당 대표 등이 문지방이 닳도록 찾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언론인으로 남겠다”고 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에지 있는’ 거절이었다.

 사람이 욕심을 버리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법정 같은 큰스님조차 애지중지하던 난초를 남에게 준 뒤에야 비로소 집착을 버릴 수 있었다고 『무소유』에서 고백했다. 하물며 무릇 사람들이야…. 더구나 그 욕심이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걸 포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게다.

 하지만 욕심에도 염치는 있어야 한다. 엄기영은 출마선언문을 쓰면서 수많은 고민을 했을 거다. 고민의 결과는 이랬다. “MBC 사장까지 하고 나서 한나라당을 선택한 것은 강원도를 위한 것이다. 강원도민을 위한 선택이다. 강원도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과 자원을 모아야 하는데 정부·여당의 전폭적 지원이 필수적이다. ”

 비겁하다. 그는 ‘내가 출마하는 이유’를 말하지 않고, 강원도민 핑계를 댔다. “원래 내가 있을 곳은 한나라당”이라고 하느니만 못했다.

 6·2 지방선거에서 10명의 야당 시·도지사를 뽑아 준 국민에게 정치인 엄기영은 뭐라고 말할 건가. 그는 지역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여당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강원지사에 당선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만의 하나 당선된 뒤 2012년 대선에서 여당이 바뀌면 어떻게 할 건가. 출마선언문대로라면 그는 당적을 바꿔야 한다.

 더 딱한 건 이런 ‘엄기영 당원’을 맞는 한나라당이다. 원수처럼 미워하고 쫓아내려 했던 사람들, 집단성명까지 냈던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괜찮다는 게 실용인가.

 정치인들이 자주 욕을 먹는 건 정치인 자체가 나빠서라기보다는 ‘술수’를 부려야 하는 무대가 공개돼 있어서다. 진흙탕 게임을 생방송하는 게 정치다. 그래서 정치에 감동이 없고 염치가 없으면, 추한 협잡과 술수만 남는다. 주연배우 엄기영이 등장한 한국 정치의 단막극은 앵커 시절 그의 멘트처럼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다.

박승희 국제부문 차장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