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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어도 불성에는 남북 없다”

혜능대사는 출생지 때문에 ‘오랑캐’ 취급을 받기도 했다. 대사를 묘족(苗族)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혜능대사는 출신 인종·지역을 극복했다. [중앙포토]
중국 정치가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독서광이었다. 그는 사회주의 서적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성경, 금강경 화엄경과 같은 불교 경전을 읽었다. 종교 서적을 읽을 필요성에 대해 마오쩌둥은 이렇게 말했다. “종교를 믿는 인민이 많은데 종교에 대한 이해 없이 어떻게 그들을 위해 일할 수 있겠는가.” 그는 특히 육조단경을 ‘노동 인민의 불경’이라고 부르며 애독했다. 육조단경을 즐겨 인용했으며 여행 시 지참할 정도였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16> 육조단경

육조단경(六祖壇經·The Platform Sutra of the Sixth Patriarch)단경이라고도 불린다. 수계식을 하는 계단(戒壇)에 올라가 행한 법문(法文)이라는 뜻이다. 단경에는 당나라 때 선승으로 선종(禪宗)의 개창자인 육조 혜능대사(慧能·638~713)의 법문뿐만 아니라 삶의 행적이 기록됐다. 단경은 부처의 말씀을 수록한 것이 아님에도 예외적으로 경(經)의 지위를 확보했다. 그만큼 중요한 경전이다. 단경의 등장으로 선종의 중심 문헌은 능가경 금강경에서 단경으로 바뀌었다. 혜능대사는 조계대사(曹溪大師)로도 불린다. 우리의 조계종이나 송광사가 있는 조계산은 혜능대사가 살던 조계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도 혜능대사와 단경은 중요하다.

『육조단경』의 영문판(P B 얌폴스키 번역·해설) 표지.
마오쩌둥이 단경을 애독한 이유는 무엇일까. 서로 이질적인 것 같지만 정치의 세계와 종교의 세계가 만날 때가 있다. 정치가와 종교인은 구조적으로는 비슷한 고민을 한다. 정치는 변화를 혁명을 통해 단숨에 이룰 것인가 아니면 점진적인 개혁으로 이룰 것인가 하는 방법론을 두고 고민한다. 종교인도 깨달음이나 구원을 단숨에 이룰 것인지 아니면 점진적인 삶의 개혁으로 이룰 것인지를 화두로 삼을 수 있다. 어쩌면 영원히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논란이다. 그리스도교의 경우에는 교단에 따라 구원의 방도로 ‘다시 태어난(born again)’ 체험을 강조하기도 하고 평생 지속되는 점진적인 믿음의 성장을 강조하기도 한다.

금강경 독경 소리 듣고 출가한 나무꾼
불교에서는 단박에 깨닫는 돈오(頓悟·sudden enlightenment)와 오랜 세월에 걸쳐 점차적으로 깨닫는 점오(漸悟·gradual enlightenment)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단경은 돈오의 방법이 주류로 자리 잡는 데 기여한 핵심 문헌이다.

단경이 그리고 있는 혜능대사의 일대기를 살피면 대사가 상대적으로 돈오에 가까운 배경을 알 수 있다. 혜능대사는 광둥성에 있는 신저우(新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하급 관리였다. 3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대사는 개가하지 않은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나무꾼으로 생계를 이어갔으며 궁핍함 때문에 글을 배울 형편이 안 돼 문맹이었다. 어느 날 나무를 짊어지고 팔러 다니는데 시장에서 금강경(金剛經) 외우는 소리를 듣고 대사는 출가할 결심을 하게 됐다. 대사는 선종의 5대조인 홍인대사(弘忍·594~674)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선법(禪法)을 물려받아 6조가 된다. 혜능대사가 6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불교적 교리를 담은 한시인 게송(偈頌) 경연에서 홍인대사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홍인대사의 제자 중에서 혜능대사의 등장 전까지 수제자였던 신수(神秀)대사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몸은 보리(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맑은 거울의 받침대와 같으니
늘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가 묻지 않게 하라
글을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혜능대사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썼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맑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
부처의 성품은 언제나 맑고 깨끗한데
어디에 티끌과 먼지가 묻을 것인가

선종의 수장자리는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자리였다. 1조인 달마대사도 여러 차례 암살 위기를 넘겼다. 홍인대사는 혜능대사에게 6조로 인정한다는 징표로 가사와 발우를 줬다. 다른 제자들의 시기를 우려한 홍인대사는 혜능대사를 남부 중국으로 보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가사와 발우를 빼앗기 위해 혜능대사를 추적했지만 대사는 위기를 넘기고 10여 년간 남방에 은둔했다. 대사는 조계산 보림사에서 40여 년간 제자를 양성하고 대중에게 불법을 전했다.

단경에서 강조되는 것은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개념이다. 깨달음은 문자를 통하지 않기 때문에 문자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불립문자의 경전적 근거는 능가경(楞伽經)이다. 능가경은 이렇게 역설한다. “문자에 따라 의미를 해석하지 말라. 진실은 자구(字句)에 묶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단경의 강조점은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이다. 사람의 마음을 직관함으로써 부처의 깨달음에 도달함을 이르는 말이다.

남종선·북종선 싸움 도구 되기도
어쩌면 혜능대사가 가난을 체험했고 글을 몰랐기에 불립문자나 직지인심을 통한 성불을 주장할 수 있었다. 단경의 생명력은 평등주의에서 나온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건 조금한 사람이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인종이나 태어난 곳도 문제가 안 된다. 북부 중국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남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오랑캐’에 불과했던 혜능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지만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 대사의 평등주의는 누구나 깨끗한 마음을 지녔다는 낙관주의와도 연결됐다. 대사는 말했다. “사람의 성품은 본래 청정한 것이기 때문에 망상과 번뇌로 뒤덮인 허망한 생각을 버리면 본래 그대로 청정해질 것이다.”

단경은 선불교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러나 단경에 독창성은 없다고 보는 견해가 강하다. 혜능대사 자신이 “이 가르침은 역대 성현들이 물려주신 것이지 내가 스스로 알아낸 지혜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단경이 선종의 핵심 문헌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심오한 내용 덕분이 아니라 혜능대사라는 인물이 지닌 소탈하고 겸허한 매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단경은 치열한 싸움의 도구로 사용됐다. 혜능대사의 제자들은 단경을 무기로 730년대 초반 신수대사 계통의 선종을 공격했다. 그 결과 선종은 신수대사를 따르는 북종선(北宗禪)과 혜능대사를 따르는 남종선(南宗禪)으로 분리된다. 싸움을 걸어 남종선·북종선을 가른 것은 남종선이다. 북종선의 선승들은 자신들이 북종선에 속한다는 의식 자체가 없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남종선은 단경을 근거로 북종선의 신수대사가 6조 자리를 찬탈했다고 주장했다. 진정한 6조는 혜능대사라는 것이다. 남종선은 부처로부터 시작하면 혜능대사가 40대 조사이며 중국에 국한해 보면 1조인 달마대사로부터 혜능대사가 6조라고 주장했다. 남선종은 계보를 확립함으로써 선종의 대내적·대외적 정통성을 확보했다. 남종선과 북종선의 치열한 다툼 속에서 선종은 다른 불교 종파와 차별화되는 정체성을 확립한 것이다.

북종선은 770년대에 정점에 도달했으나 그 이후 정치적·사회적 요인으로 쇠퇴의 길에 접어든다. 당나라 말기 이후에는 남종선이 독주한다. 그러나 남종선 또한 쇠퇴하게 된다. 남종선·북종선 모두 사라졌으나 ‘돈오 vs. 점오’ 논란은 남았다. 남종선의 주장에 따르면 남종선은 돈오를, 북종은 점오를 표방했다. 남종선은 물론 돈오가 점오보다 우월하다고 봤다.

오늘날 상당수 학자는 돈오·점오가 우열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돈오·점오는 상호 의존 관계라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신수대사와 혜능대사의 게송도 깨달음의 두 측면을 예시한다고 해석한다. 과연 북종선이 점오를 주장했는지도 의문시된다. 남종선은 돈오, 북종선은 점오라는 범주화는 지나친 단순화라는 것이다.

위작 논란 속, 전 세계 선방에서 학습
정치의 세계에서 우파와 좌파 사이의 갈등보다는 중도 좌파와 좌파, 우파와 중도 우파 간의 갈등이 더 첨예한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좌우파 간의 큰 차이보다 사소한 차이점이 부각된다. 돈오·점오를 둘러싸고 같은 선종인 남선종과 북선종이 벌인 대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단경이 격화시킨 돈오·점오 논란 못지않게 첨예한 문제는 단경 내용이 과연 혜능대사의 삶과 사상을 반영하느냐의 문제다. 700~720년께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단경은 판본이 20여 종 있다. 그중 1907년에 발견된 돈황본 단경은 830~860년께 저술된 것으로 추정된다. 후대의 판본과 비교하면 단경이 수정·증보를 거듭했음을 알 수 있다. 돈황본 단경에는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내용, 모순되는 내용이나 명백한 오류가 발견된다. 상당수 학자는 단경에서 신화와 역사적 사실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단경이 혜능대사 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극단적인 주장도 있다. 혜능대사의 제자들이 북종선과 싸우기 위해 만든 위작이라는 것이다.

위작 논란에도 불구하고 단경은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불교가 서양을 비롯한 세계 전역으로 전파됨으로써 단경은 전 세계 선방에서 읽히게 됐다. 여러 각도에서 단경 옹호론이 제기된다. 우선 문헌과 저자의 관계를 오늘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단경은 엘리트와 대중 모두에게 인기 있는 경전이었다. 유교의 성선설과 부합됐으며 단경에 흐르는 도교적인 분위기는 대중에게 친숙했다. 지식인들도 여러 경전의 정수가 담긴 단경에 만족했다. 선종은 반지성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단경의 학문적 깊이는 혜능대사가 문맹이었다는 정설에 의문을 품게 한다. 불립문자를 강조하면서도 선종은 경전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선불교는 불교 교단 중에서도 가장 방대한 경전을 축적했다. 혜능대사가 금강경 한 구절을 듣고 깨달음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은 선종과 경전의 관계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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