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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오빠 남진 “베트남전 다녀오니 나훈아가 스타 됐더군요”





내달 5일 세종문화회관서 데뷔 45주년 콘서트



올해로 데뷔 45주년을 맞이한 가수 남진은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린다. 다음 달 5일 열리는 기념 콘서트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의상을 입고 추억의 히트곡과 팝송을 부를 예정이다. [프리랜서 박상윤]



가수 남진(65)은 1970년대의 아이콘이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70년대의 것이 아니다. 70년대를 살아냈던 이도, 70년대 이후 태어난 이도 그의 노래 한 두 소절쯤 어렵잖게 불러낸다. 어떤 이에게 남진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님과 함께’) 꿈이었고, 누군가에겐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가슴 아프게’)으로 시작되는 슬픈 연서였으며, 또 다른 이에겐 ‘그대의 싸늘한 눈가에 고이는 이슬이 아름답다’(‘빈잔’)는 수줍은 고백이었을 테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남진이 있는 법이니까.



남진은 올해로 꼬박 마흔다섯 해를 가수로 살았다. 다음 달 5일 오후 3시, 7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데뷔 45주년 기념 콘서트를 펼친다. 65년 스무 살 청년 남진이 데뷔했던 바로 그 무대다. 그는 “노래 좀 하려고 하니 45년이 흘러버렸다. 노래에 대한 애착이 더 깊어진다”고 했다.



# 영화배우를 꿈꿨던 멋쟁이 청년



 남진의 원래 꿈은 영화배우였다. 그래서 대학도 한양대 연극영화학과를 택했다. 그런데 대학 새내기 때 엉뚱하게도 가수로 방향을 틀었다. 한 클럽에서 우연히 노래했던 게 인연이 됐다. 클럽 사장이 그를 작곡가 한동훈에게 소개했다. 한동훈은 남일해의 ‘심야의 종소리’ 등을 작곡한 당대 최고의 히트 작곡가였다. 불쑥 선택한 가수 생활은 훗날 작곡가 김영광과의 인연으로 이어졌고, 첫 히트곡 ‘울려고 내가 왔나’가 탄생했다.



-영화배우를 꿈꾸다 가수로 바뀌었네요.



 “하하. 그런 셈이죠. 그날 제가 클럽에서 노래를 하지 않았다면 인생이 어떻게 전개됐을까 궁금해요. 사실 가수로 인기를 끌면서 영화도 60여 편 정도 출연했어요. 크게 히트한 작품은 없지만 어쨌든 가수가 되는 바람에 영화배우 꿈도 이뤘습니다.”



-데뷔 무대가 생생하죠.



 “어제 일처럼 선명하죠. 65년 겨울이었을 겁니다.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생애 첫 무대에 올랐죠. 최희준·김상희 등 당대 최고 스타들이 서는 무대였어요. 예상 밖으로 큰 환호성을 받았습니다.”



-세종문화회관을 잊을 수 없겠군요.



 “45주년 기념 공연을 세종문화회관(구 시민회관)에서 하는 것도 첫 무대에 대한 기억 때문이에요. 베트남 참전(※남진은 청룡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에 파병됐다) 이후 귀국 리사이틀을 연 곳도 시민회관이죠. 72년 MBC 가수왕 시상식을 시민회관에서 했는데, 그날 상을 받고 막을 내리는데 화재가 났어요. 불타버린 시민회관이 나중에 세종문화회관으로 바뀌었죠. 화재가 난 이후론 한 번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른 적이 없어요.”



# 평생의 라이벌, 나훈아



 남진은 70년대 최고 인기 가수였다. 71년부터 73년까지 MBC 가수왕을 내리 휩쓸었다. 그는 “71년 가수왕 시상식 때 ‘오빠’ 하는 함성을 처음 들었다. 우리 가요계에 맨 처음 오빠부대가 생겨난 순간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요즘 말로 아이돌 가수였던 셈이다. 그런 그의 이름엔 늘 따라붙는 이름이 있었다. 나훈아(64). 한 살 터울의 두 가수는 당대 최고의 라이벌이었다.



-남진에게 나훈아가 지니는 의미는.



 “베트남전을 다녀오니 나훈아가 벌써 스타가 돼있더군요. 자연스럽게 남진·나훈아 라이벌 구도가 생겨났죠. 팬들과 그 시대가 만들어준 라이벌이에요. 정치판에 YS(김영삼)·DJ(김대중)가 있듯 가요계엔 남진·나훈아가 있었죠. 나훈아와 라이벌이 됐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에요.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할 수 있었으니까요.”



-70년대 쇼 프로그램은 장악하셨겠어요.



 “저는 TBC(동양방송) 전속 가수였어요. 당시 TBC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인 ‘쇼쇼쇼’에는 단골 출연했죠. TBC가 가수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 겁니다. TBC가 그대로 존속했다면 현재 우리나라 쇼 프로그램의 질이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중앙일보가 다시 방송을 시작한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80년대엔 활동을 거의 안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출연 명단에서 빠졌어요. 옛날 연예인은 제외하라는 정치적인 외압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5공화국이 막 출범하던 때였으니까요. 활동이 중단되고 한 3~4년 고향(목포)에서 지냈었죠.”



# 가요계 큰 어른의 바람



 데뷔 45주년을 맞이한 가요계 큰 어른으로서 요즘 가수들에 대한 아쉬움은 없을까. 그는 이른바 잘 나가는 기획사 사장들에게 “소속 가수들을 1회용 상품으로만 여기지 말고 인성 교육도 철저히 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곤 한단다.



-요즘 가요계는 어떤 시각으로 보시나요.



 “한류로 세계적인 성과를 내고 있으니 자랑스럽죠. 하지만 한편으론 요즘 가수들에겐 인간적인 면이 좀 부족한 것 아닌가 싶어요. 가수는 예술인이잖아요. 예술은 인품이 갖춰질 때 진정성이 묻어나는 법이거든요.”



-가수 인생 45년 가운데 가장 아쉬운 점은.



 “20대 초반에 인기를 얻어 사회와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점이에요. 젊은 시절 가수로서 더 노력하지 않았던 게 마음에 걸립니다.”



-노래를 얼마나 더 하실 수 있을까요.



 “50주년 무대는 반드시 마련할 겁니다. 그 이상은 잘 모르겠어요. 팬들이 계속 하라고 하면 하는 거고…. 과연 노래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은 됩니다.”



 남진에게 50주년을 넘어 60주년, 70주년 무대가 허락될까.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 가요사는 그의 이름을 가장 큰 글씨로 적는 걸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가수로서 남자로서 멋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1544-1555.



글=정강현 기자

사진=프리랜서 박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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