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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극 칼럼] 복있는 나라 Ⅱ




문창극
대기자


이집트 사태를 보면서 한국은 복 있는 나라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군중은 1987년 우리의 6월항쟁을 기억하게 했다. 우리는 그 후 착실하게 민주화 과정을 밟아 여야 간 정권교체를 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집트는 어떻게 될까? 군중의 힘에 의해 무바라크는 무너졌지만 군부에 의한 과도정권이 들어섰고 미래가 어디로 향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정치가 불안한 나라에 누가 투자를 하겠으며, 투자가 없는 나라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직장을 얻겠는가. 악순환이다. 남의 나라지만 그런 걸 생각하면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하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는 권위주의 때문이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는 필요한 시점에 그 시절에 맞는 지도자와 체제를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승만은 신생국의 첫 지도자였다. 나라의 틀을 만드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라는 틀을 만들었고, 한국전쟁을 겪으며 미국과 안보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방의 틀을 다졌다. 박정희는 그 기초 위에 경제적 번영의 기반을 닦았다. 물론 그때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혹시 민주화가 먼저 왔다면 안보와 번영의 기초를 만들 수 있었을까. 세계 어느 나라도 신생국으로서 안보, 경제, 민주라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한 나라는 없다. 우리는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국가 형성에 꼭 필요한 순서대로 안보, 경제, 민주의 목표를 차례로 달성했다. 이집트의 경우 군중의 힘으로 독재자를 무너뜨리기는 했지만 대안세력이 없었다. 그래서 권력이 군부로 넘어간 것이다. 우리는 자유당 시절부터 야당이 있었다. 그 야당의 존재가 민주시대에 대안세력이 됐다. 그런 점에서 한민당, 민주당으로 내려왔던 전통 야당의 존재 역시 우리에게는 소중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 목표를 달성했다고 이제 느긋하게 지내면 되는가? 권위주의를 극복하고 민주시대를 맞았으니 이제는 다 이루었는가? 모든 성공은 그 안에 파멸의 씨앗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마지막 단계로 이루어낸 민주화가 먼저 이룩한 안보와 경제의 기틀을 파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이율배반인 것이다. 민주화가 된 이 나라의 요즘 돌아가는 모습을 보라. 곳곳에서 벌어지는 세금낭비가 얼마인가. 쓸모없는 공항을 몇 개나 만들었으며, 경전철이니 뭐니 곳곳마다 세워놓고 운영도 못 하는 시설물들이 얼마인가.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민주주의 자체가 갖는 약점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표로 통치자를 선택하는 제도다. 보통사람들은 미래보다는 현재에, 눈앞의 이익에 더 집착한다. 그래서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다. 복지문제만 하더라도 현재 사는 사람들이 자기 몫만 크게 받으려 한다면 후손들은 빚더미에 앉게 된다. 안보도 마찬가지다. 야당은 나라 운명이 어떻게 되든 전쟁을 무서워하는 일반 국민의 정서만을 이용하려 든다.

 대통령은 행정수도에 이어 과학벨트 입지에 대한 공약을 파기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공약대로 한다면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잘못을 뒤늦게라도 시정하는 것은 용기있는 일이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 이 점에서 박근혜의 지적은 옳다. 그러나 그녀가 주장하는 원칙의 잣대는 무엇인가. 행정수도 고집이나 과학벨트 언급은 단지 약속을 지킨다는 이유 때문일까. 국가 안보가 어려울 때는 한마디도 안 하다가 불쑥 복지정책을 꺼내든 이유가 무엇인가. 국가의 미래보다 선거의 표 때문은 아닐까.

 여러 가지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업적이 인정받는 것은 미래를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졌고 이를 추진한 능력 때문이다. 만일 그때 지금 같은 민주주의 방식으로 나랏일을 결정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이 갔던 길을 우리가 갈 수 있었을까? 그때는 어쩔 수 없이 권위주의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권위주의자였지만 개인적으론 청렴했다. 이집트의 무바라크, 혹은 우리의 군부 출신 대통령들처럼 부패하지 않았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이 지금처럼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박정희식 권위주의 덕분이었다. 실제 그들은 박정희 모델에 관심이 깊었다. 만약 현명한 지도자들이 권위적으로 다스린다면 싱가포르처럼 효율적인 번영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단계가 지나면 민주화 욕구는 불가피한 것이다.

 민주주의 나라에서 비효율이 판치면 효율이 그리워 권위주의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한번 민주주의를 맛본 나라는 다시 권위주의로 돌아갈 수 없다. 반면 무한의 자유를 요구하며 광장으로 내닫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그러나 광장은 혼란만 불러온다. 우리는 어렵게 제도화해온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 단, 책임과 자유를 함께 누리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지닌 약점을 극복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망각하기 쉬운 미래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복 있는 나라를 지켜갈 책임은 국민 각자에게 있는 것이다.

* ‘복있는 나라’는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FTA를 주도한 데 대한 소감을 쓴 2007년 4월 3일자 칼럼 제목이었음

문창극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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