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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영미, 유럽 축구 현장을 가다 ④ 내 사랑, 바르셀로나





홈팬 9만 명의 미친 듯한 응원
벌벌 떨다가 경기장을 탈출했다



FC 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오른쪽)가 아틀레틱 빌바오와의 경기에서 2-1 승리를 이끄는 결승골을 뽑고 있다. [바르셀로나 로이터=연합뉴스]





상대가 강할수록 승리의 기쁨은 크다. 바르셀로나와의 경기를 마치고 아스널의 주장 세스크는 말했다. “우리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을 꺾었다.” 서로 적이 되어 싸웠지만 세스크와 메시는 어려서 같이 밥을 먹던 친구, 둘 다 바르셀로나 유소년축구 팀 출신이다. 런던에서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본 다음날, 나는 바르셀로나로 날아갔다.











 한국에서보다 아주 가까이, 손을 뻗으면 만져질 듯한 밤하늘에 탐스러운 보름달이 떠 있다. 달빛 아래 공을 차는 아이들은 행복해 보였다. 여기는 FC바르셀로나의 훈련장인 치우타트 에스포르티바 호안 감페르(Ciutat Esportiva Joan Gamper). 그 긴 이름만큼이나 규모가 어마어마해 9개나 되는 축구장에다 농구장도 옆에 붙어 있다. 저녁 8시. 환하게 불이 켜진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 중에 한국인 백승호(1997년생) 선수도 있다. 2010년 4월부터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의 유니폼을 입은 그를 훈련이 끝난 뒤에 만나 보았다.



-처음 신은 축구화 기억나니?



 “초록색이었어요.”(실내화처럼 바닥이 닳도록 신었다고, 옆에 서 있던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어떤 선수가 되고 싶니?



 “패스는 사비, 움직임은 이니에스타, 드리블은 메시를 닮고 싶어요.”



 아직 사춘기도 오지 않은 14살의 소년인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알고 있고, 낯선 환경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바르셀로나 홈구장 앞에 선 최영미 시인.



 2월 21일. FC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인 캄프 누(Camp Nou) 옆의 지하철역. 오랜 습관대로 출구의 전자감지기에 표를 갖다 대려다 나는 멈칫했다. 한국이나 영국에서는 전철을 나올 때도 표를 집어넣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탈 때만 확인하고 나올 때는 그냥 통과다. 사소한 차이지만, 시민의 편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바르셀로나 시의 행정이 부러웠다. 오후 5시11분. 오래 줄서서 기다린 끝에 캄프 누를 체험하는 입장권을 샀다. 경기를 직접 보는 게 아니라, 경기장을 구경하는 박물관 관광을 위해 (한 끼 식사비와 맞먹는 돈을 기꺼이 지불하겠다고)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 경기장으로 건너가는 다리에 바르셀로나 팀의 유명한 표어인 “M<00E1>s que un club”(영어로 More than a club, 한국어로 직역하면 ‘클럽 그 이상’쯤 된다)가 서 있고, 그 밑에 나열된 문구들….



 카탈란의 정체성, 국제주의, 사회에 대한 공헌, 민주주의.



 민주주의를 간판에 내건 스포츠클럽이 또 있을까.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30회 이상 들어올린 사실로만 이 붉고 푸른 줄무늬의 운동복을 설명할 수 없다. 바르셀로나에서 1899년 호안 감페르(Joan Gamper)의 주도하에 스위스, 영국, 그리고 스페인 선수들이 모여 만든 Futbol Club Barcelona (팬들에게 ‘바르샤(Bar<00E7>a)’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간단히 FCB로 표기한다)는 프랑코 군부독재의 탄압을 받으며 카탈란 주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시작된 한 달 뒤에 바르셀로나와 아틀레틱 빌바오의 몇몇 선수가 군부에 반대하는 조직에 이름을 올렸고, 그해 8월에 바르샤의 구단주 요셉 순욜(Josep Sunyol)이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죽음은 FCB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고, 그날 이후 바르샤는 ‘단순한 축구클럽 그 이상’이 되었다. 내전이 끝나고 스페인어가 아닌 언어의 사용이 금지되면서 FCB는 이름이 스페인 식으로 바뀌었고 카탈란 국기가 클럽의 방패에서 제거되었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제한되던 시절, 축구장은 수많은 사람이 합법적으로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고, 경기장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정부에 대한 항의를 암묵적으로 전달했다.



 피로 얼룩진 바르샤의 역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서도 전달되는 특별한 분위기에 반해 나는 그들의 팬이 되었다. 대자본에 귀속된 지구상의 수많은 클럽과 달리, FC바르셀로나는 팬들이 소유하고 운영한다. 유엔 산하기구인 유니세프를 제외한 어떤 기업의 이름이나 광고를 팀의 운동복에 새기기를 거부했던 바르샤는 경제위기를 겪으며 최근에 나이키의 작은 로고를 앞가슴에 넣는 타협을 시도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길을 통제하는 안내원은 없지만, 자유롭게 사람들을 풀어놓으면서도 매우 체계적으로 짜여진 관광을 나는 즐겼다. 운동장 입구에 도달하자 귀에 익은 선율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가 스피커에서 울렸다. 80년대에 즐겨 부르던 노래가 바르샤의 응원가였다니. 경기장 체험을 마치고 기념품 가게에서 셔츠를 샀다.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산 유일한 옷인 바르샤 유니폼을 가방에 넣고, 캄캄한 저녁에 성 안나(Santa Anna) 성당의 예배당에서 기타연주를 들었다. 뉴욕 필하모니처럼 듣는 동안에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청중을 압도하지는 않았지만 잔잔하면서도 난폭한, 아름다운 도시 바르셀로나에 어울리는 음악이었다.



 2월 20일. 밤 9시가 맞나요? 겨울인데 일요일인데 왜 밤에 경기를 하나. 투덜대면서 캄프 누로 걸어가는데 ‘마드리드에 반대하며’라는 문구를 내건 기념품 노점상들이 보였다. 오늘 바르샤의 상대는 바르샤처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며 (국제적인 바르샤와 달리) 100% 바스크 혈통의 선수들로만 구성된 아틀레틱 빌바오. 마드리드에 대한 적개심을 공유한 두 팀은 사이가 좋다는데, 막상 경기가 시작되니 관중들은 미칠 듯이 바르샤만 응원한다. 심지어 경비복을 입은 할아버지도 심판의 판정에 항의하며 손을 흔들고 야유를 보낸다. 9만 명쯤 되려나. 내 평생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앉아, 그렇게 크게 소리 지르는 장면은 처음 목격한다. 행여 무슨 사고라도 당하지 않을까, 벌벌 떨며 경기를 지켜보다, 비야와 메시의 골로 2대1로 앞서가던 후반 30분쯤 인파에 치이지 않으려고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큰 나이트클럽이라는 캄프 누에서 나는 비겁한 관찰자. 나의 밤은 그들의 낮보다 뜨겁지 않았다.



최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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