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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의 그림 같다, 으스대지 않고 풍경에 스며든 기념관





홍성 중계리 기념관 미리 가보니
건물 안에도 작은 언덕·마당 …
자연과 어우러진 문자추상
고암 화법을 건축에 옮긴 듯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이 화가의 고향인 충남 홍성군에 들어섰다. 생가가 있던 자리에 화가가 살았을 당시의 농가를 재현했다. 건물이 주변 환경과 어우러진 풍경 자체가 기념관 역할을 한다. 2만㎡의 부지에 12370㎡ 규모로 지어졌다. [프리랜서 김성태]





“난 한국 사람이야. 조국 땅에 돌아가 묻히고 싶은 사람이야.” (1972년 12월 5일 중앙일보)



 비운의 화가는 이 작은 꿈을 이루지 못했다. 냉전의 역사에 휘말려 옥고를 치르고 고국을 떠났던 그는 1989년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자신의 첫 대형 회고전이 열리기 직전 이국 땅에서 눈을 감았고, 프랑스 파리 페리 라세즈 묘에 묻혔다. 고암(顧菴) 이응노(1904~89)다.



  이응노 생가기념관(주관 홍성군, 전시준비위원장 유홍준)이 오는 5월 문을 연다. 그의 고향인 충남 홍성군 중계리에 마련된 기념관은 최근 준공을 마치고 전시 준비에 들어갔다. 스케치와 초기 작품과 유족이 기증한 유품과 사진자료 등이 전시될 예정이다.



  그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예술이란 자신의 뿌리를 나타내는 작업입니다.(…) 저는 충남 홍성 사람입니다”고 말했을 만큼 고향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표출했었다. 획(劃)과 점(<3E03>)을 통해 자유롭게 구성해가는 독창적인 화법인 ‘문자추상’을 설명하며 ‘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 본질이라고 강조했던 그였다. 기념관은 고암의 삶과 예술을 어떻게 담아냈을까. 기념관 건물이 들어선 현장을 먼저 찾아가봤다.









고암기념관 내부. 홀과 경사로만 보이지만 숨겨진 각도에 4개의 전시실이 있다. [건축사진가 김재경]



◆자연스러움과 소박함의 충격=서울 용산역에서 장항선 기차를 타고 2시간이면 닿는 곳. 역에서 자동차로 7~8분을 달리자 낮은 산자락 아래 둥지를 틀고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건물이 보였다. ‘나, 기념관이야’하고 으스대는 느낌이 없다. 주변의 언덕과 나무를 위협하지 않는 낮은 키의 여러 개의 상자가 이어 붙여진 듯한 모습이다. 건물은 수수한 옷을 입었다. 콘크리트와 흙, 나무 등의 재료를 썼다.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에 무게를 실은 건물은 ‘튀는 기념관’을 기대하고 온 이들에게는 충격을 줄 정도다.



  충격은 안에서도 이어진다. 크고 웅장한 로비나 대리석 바닥이 없다. 기념관은 방문객에게 ‘한 눈’에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다. 각도를 조금씩 틀어 전시실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길게 이어진 경사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 모습을 숨어 있던 방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바깥에도, 안에도 시골마을=기념관을 함께 둘러본 풍경이론가 강영조 교수(동아대 도시계획·조경학부)는 공간구성을 주목했다. 강 교수는 “바깥에서 시골풍경을 보았는데, 안에서 다시 토속적인 시골마을을 압축한 풍경을 만났다. 언덕길을 따라 드문드문 앉은 집들을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건물의 내부 바닥은 가장 낮은 곳과 높은 곳의 차이가 2.2m에 이른다. 땅의 본래 모양을 건드리지 않고 경사로를 살렸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이곳 어느 방에서 고암 선생이 불쑥 걸어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가가 살았던 시대와 공간의 느낌을 포근하게 표현했다”고 말했다. 시각디자이너 안상수 교수(홍익대 시각디자인)도 “풍경에 스며들 듯 자리잡은 건물, 흙벽의 따뜻한 느낌이 좋다. 고암의 글자추상을 그대로 닮았다”고 평했다.



◆풍경 자체가 기념관=건축가는 조성룡(67·성균관대 건축학과 석좌교수·도시건축)씨다. 2008년 공모에서 선정돼 설계를 맡았다. 조씨는 건축계에서 ‘풍경의 건축가’로 불린다. 의재미술관(2001)·선유도공원(2002) 등 있는 그대로의 지형을 살리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기념관에도 이 같은 철학을 담았다. 무엇보다 풍경회복에 방점을 찍었다. 고암이 살았을 당시에 바라보았을 풍경과 길을 다시 살려놓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관람객들이 용봉산을 바라보고 일월산을 산책하며 고암이 사랑한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전시실에 가능하면 인공조명을 쓰지 않으면서 벽에 반사돼 여과된 빛이 들어오도록 창을 배치하고, 외벽에 붙인 나무도 매끈하게 다듬어진 면보다는 거친 면을 노출시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변색되도록 연출했다.



  조씨는 “건물과 들판, 기념관 앞에 조성한 연밭은 별개가 아니다. 이 모두가 하나의 풍경이다. 건물만이 기념관이 아니라 산과 들판, 길 등이 모두 어우러진 풍경 전체가 기념관”이라고 말했다.



  김일현 교수(경희대 건축학과)는 고암기념관을 계기로 그간 전시행정에만 초점을 맞춰 지역공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 못한 여타 기념관·박물관 등을 재평가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념관은 요란한 시각적 구호처럼 지어지기 일쑤였다. 지역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문화 콘텐트를 세밀하게 읽고 주변환경을 포용해야 한다. 풍경자체가 가치 있는 문화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홍성=이은주 기자











◆이응노(李應魯·1904~89)=충남 홍성 태생. 호는 고암(顧菴). 서화가인 김규진 화백으로부터 수묵화 등을 배웠다. 스무 살 때인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 입선하고 도쿄 유학을 다녀온 뒤 홍익대·서라벌예대 교수로 일했다. 55세 때인 58년 서독에서 개인전을 열고 이후 파리에 정착했다. 60년대 후반 반정부 간첩단사건인 동베를린 사건으로 2년 반 동안 옥살이하는 등 정치사건에 휘말려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89년 국내 첫 대규모 회고전(호암갤러리)에 이어 94년 5주기 회고전(호암갤러리)도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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