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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로 음악으로 사진으로…영원히 살아있는 백남준

1 머서가 110번지 아파트에서 구보타 시게코(왼쪽)와 이은주 작가가 ‘백남준 Ⅱ’ 조각상 옆에 서 있다.
말년의 백남준에겐 두 여인이 있었다.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가 백남준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던 동료 작가이자 성심껏 병수발을 들던 아내였다면, 사진작가 이은주는 15년간 지근거리에서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온 성실한 기록자다. 이 작가는 본지에 ‘사진으로 만난 인연’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는 ‘문화계 마당발’이기도 하다. 이 작가가 백남준 5주기(1월 29일)를 맞아 기획한 사진전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삶과 예술’은 한국(2010년 10월 15~23일·성남아트센터 미술관), 일본(2010년 10월 25~31일·도쿄 한국문화원), 미국(2월 9일~3월 4일·뉴욕 한국문화원)을 순회 중이다. 딸 최시내 사진작가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 강수진’과 함께하는 모녀 공동 전시다. 구보타 여사는 이번 전시의 오프닝 및 중앙일보 남정호 국제선임기자와 같이 쓴 『나의 사랑, 백남준』 출판기념 뉴욕 사인회 참석을 위해 양손 지팡이에 온몸을 의지해야 하는 불편함에도 9일 뉴욕 한국문화원을 찾았다.

백남준 5주기 사진전 연 사진작가 이은주와 백남준의 부인 구보타를 뉴욕에서 만나다

2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준비하고 있는 백남준.
<ㅠ>파크 애버뉴 460번지, 사진작가 이은주
뉴욕 한국문화원(원장 이우성)은 맨해튼에서도 가장 중심지인 파크 애버뉴 460번지에 있다. 9일 오후 6층 전시장은 200여 명의 국내외 관람객으로 가득 찼다. 이은주 작가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이들을 맞았다. 관람객들은 이 작가가 수천 컷 중에서 고른 30여 점의 사진을 둘러보며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음미했다. “서구에서는 동양인이 이미테이션은 잘하지만 창의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점은 부족하다고들 말하는데 백남준은 그런 면에서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해줬다”(한인커뮤니티재단 KACF 윤경복 사무총장), “비디오아트의 아버지로서 경제뿐 아니라 예술 분야에서 한국의 힘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변호사 앤드루 요나스 샌더스), “사진전으로만 그치지 말고 백남준의 예술적 영향력을 더 깊게 전달하는 방안을 연구했으면 좋겠다”(숙명여대 정영양자수박물관의 정영양 관장)는 다양한 소감이 나왔다.

김영목 뉴욕총영사, 김태자 세종솔로이스츠 전 이사장, 신순심 리틀엔젤스 초대단장, 줄리아드음대 강효 교수 부부, 조지타운대 미대 문범강 교수, 애술린 아시아 한영아 대표, AHL 파운데이션 줄리에 장 부회장 등도 전시장을 찾았다. 오프닝을 마치고 한숨 돌린 이 작가에게 물었다.

3 백남준이 쓰던 책상4 백남준이 독일 부퍼탈 시절을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만든 작품.
-백남준 선생과는 언제 처음 만났나요.
“1992년 문예회관 대극장(현 아르코 예술극장)에서였어요. 리허설에 기자들이 몰렸는데 플래시가 방해된다며 ‘다 나가라’고 호통을 치셨죠. 다들 돌아갔지만 전 그럴 수 없었어요. 선생님을 제 작품 리스트에 꼭 넣고 싶었어요. 그래서 무대 뒤로 다시 올라가서 몰래 계속 찍었죠. 나중에 사진을 앨범으로 만들어 가져다드렸어요. 그랬더니 ‘사진가에게 사진을 선물받은 것은 처음’이라며 참 좋아하시더라고요.”

-왜 작품 리스트에 꼭 넣고 싶었나요.
“파격적인 퍼포먼스가 한눈에 보기에도 천재성이 번득였어요. 92년 회갑잔치에도 참석하게 됐는데 전 세계 유명 큐레이터들이 모두 몰려온 것을 보고 대단한 분이라는 것을 실감했죠. 그분은 평소에는 천진하기가 어린아이 같아요. 하지만 작업을 시작하거나 작품 얘기를 하면 얼마나 비범하고 날카로워지는지 몰라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분과는 꼭 인연이 될 것이다’고 생각했습니다.”

-뉴욕을 자주 찾으셨다면서요.
“그 뒤로 매년 인사를 드렸는데 97년 뉴욕에서 연수를 하면서 부쩍 가까워졌죠.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뒤라 거동이 불편하셨는데 그래도 꾸준히 스케치를 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시게코와도 그때 친해졌죠. 그 덕분에 제가 꾸준히 사진작업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몰라요. 98년인가, 제가 찾아가자 대뜸 오르간을 연주하시더라고요. 그것도 한 손으로. ‘울 밑에 선 봉선화야’와 ‘신라의 달밤’을 연주하셨는데 어찌나 구슬프던지.”

-2000년 구겐하임전을 찍은 사진들이 인상적입니다.
“아주 중요한 전시라 꼭 찍고 싶었죠. 선생님은 미술관이 모든 편의를 제공해줄 거라고 제게 쪽지를 써주셨지만 플래시도 안 되고 삼각대도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카메라를 손에 들고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악착같이 찍었죠. 그때 미국 관람객들이 어찌나 많던지 가슴 벅차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면.
“선생님은 평소 ‘여든에 회고전을 하겠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내가 병들면 안락사를 시켜달라. 예술가가 병들면 세상에 살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도 했죠. 그런데 편찮으시게 되니까 오히려 생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시하더라고요. 병원도 열심히 다니시고. ‘돌아가시면 이 집은 기념관으로 쓰게 되나요’라고 여쭸다가 ‘그런 말 하려면 당장 나가’라고 호통을 맞기도 했어요.”

-돌아가셨을 때 충격이 컸겠습니다.
“마침 캘리포니아에서 전시를 하고 있을 때였어요. TV에서 보고 깜짝 놀라 뉴욕으로 날아왔죠. 장례식 모습도 모두 찍었어요. 시게코는 ‘은주, 멀리서 왔으니 남준 손도 한번 만져봐라’고 하더군요.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시게코와 몇 차례 만났어요. 그럴 때마다 시게코는 ‘은주, 네 사진을 보니 남준이 보고 싶어’라면서 그리워했죠.”

-앞으로 계획은.
“지금 LA와 런던 전시를 논의 중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선생님 예술의 고향이었던 독일에서 전시를 하고 싶어요.”

머서 스트리트 110번지, 구보타 시게코
10일 오후. 맨해튼 남쪽에 있는 뉴욕대를 지나 소호 쪽으로 향한 지 얼마 안 돼 택시가 멈췄다. 머서(Mercer) 스트리트 110번지 건물의 인터폰을 눌렀다. 이곳은 백남준 선생과 구보타 시게코 여사가 전위예술단체 ‘플럭서스’의 수장이었던 조지 마키우나스로부터 1974년 구입한 집이다. 마키우나스는 백남준과 결별 이후 부동산 개발업자로 변신했는데, 그의 수완 덕분에 소호는 예술가를 위한 동네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백남준의 2000년 구겐하임 전시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천장이 높은 이 옥탑방에는 백남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왼쪽 영상 작업실에는 수많은 테이프 등이 꽂혀 있었다. 오른쪽은 침실과 부엌으로 쓰는 공간. 실내 곳곳엔 구보타 여사의 작품이 있었다. 철망으로 만든 남녀 조각상 속에 모니터를 설치한 작품은 2000년 선보인 ‘섹슈얼 힐링(Sexual Healing)’. 그 옆으로 서 있는 작품은 남편을 그리며 2007년 제작한 ‘백남준 Ⅰ’이다. “여기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남준이 13살 때 작곡했다는 음악이에요.”

침대 머리맡 바람벽에는 백남준이 투병 중 스케치했던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2007년 제작한 ‘백남준 Ⅱ’가 서 있었다. 왼손엔 바이올린을, 오른손엔 부처의 두상을 들고 있는 키가 2m75㎝에 이르는 거대한 남자의 철망 조각상. 받침대에는 남한과 미국·독일 등의 지도가 보였다. 조각상 속에 설치된 15대의 모니터에서는 백남준·구보타 부부의 행복한 모습이 흘러나왔다.

창문엔 커다란 베이지색 커튼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책상 위엔 각종 전시회 포스터와 자료, 불상, 향, 사진 등으로 어지러웠다. 그 사이로 검정 가면이 보였다. 눈을 감은 백남준의 얼굴이었다. “남준이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전시 때 만든 거예요. 자기 데드 마스크라면서 전시장 한쪽에 걸어놓고 좋아했죠. 하하.”

9일 사진전 오프닝 및 출판 사인회가 대성황으로 끝난 것이 이 여류 작가의 심기를 편하게 했나 보다. 그는 부엌과 화장실만 빼고 다 사진을 찍어도 좋다고 했다. 특별히 옷장 위 2층으로 올라가 보라고 했다. 그곳엔 장난감 케이블카 같은 것이 매달려 있었다. “이게 남준이 남긴 마지막 작품이에요. 독일 소도시 부퍼탈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며 그곳의 전차를 이렇게 케이블카처럼 만들었죠.”

백남준은 부퍼탈에 있는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63년 첫 개인전을 했다. 13대의 TV를 이용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전시는 비디오아트의 탄생을 알린 의미 있는 전시였다.
그는 여전히 남준을 만난다. 그가 남긴 비디오를 보며 대화를 나눈다. “지난 설에는 꿈에 나타났어요. 대리석이 깔린 현관을 지나 녹색 벽이 있는 방에 들어서니 그가 있었어요.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고 있었죠. 난 왜 청소를 하고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는 마치 살아 있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기가 우리 아파트야’라고 말했어요.”

구보타 여사는 젊었을 땐 후지산도 등반했을 정도로 강골이었는데 유방암 수술 이후 건강이 안 좋아졌다고 했다. 남준과 매일 가던 카페 제리가 멀리 떨어진 챔버 스트리트로 이사 간 뒤 추억을 되새길 만한 곳이 사라져서 아쉽다고 털어놓았다.
백남준 선생이 ‘울밑에 선 봉선화야’를 치던 오르간 위에는 그의 기사가 실린 잡지가 반듯하게 올려져 있었다. 구보타 여사는 “이 오르간은 기증하고 싶다”고 말했다. “누가 도와준다면 갖고 있는 작품들로 전시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글로벌 아티스트 백남준이 남긴 이 많은 자료가 제대로 빛을 볼 날은 언제일까. 말로만 백남준의 예술성을 외치면서 정작 그에 대한 연구를 우리는 제대로 하고 있긴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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