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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이문열 연재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5-4





“돌아가야지, 언제까지 이 길바닥 헤맬 수는 없지”



일러스트: 백두리 baekduri@naver.com



배영기의 돌출적인 고백은 우리 길거리 대학의 교과 과정에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해한다’에서 겨우 ‘습득한다’로 발돋움하고 있던 우리의 교육 목표는 그의 창작계획에 자극되어 ‘적용한다’ ‘실현한다’로 발전해 갔고, 우리가 한 학기로 예정한 백일이 지났을 때는 우리 모두가 동참하는 창작뮤지컬 기획 과정의 일부로까지 전화하게 되었다. 그만큼 백영기가 들려준 소재는 우리 의식에 깊은 인상을 남긴 듯했다.



 내가 임화의 딸 이야기를 두고두고 되씹어 보게 된 까닭은 아마도 내가 한때 김수임을 극화해 보려고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도 배영기와 비슷한 시기에 김수임과 같은 연배인 여류 문인이 소설로 내놓은 그녀의 일대기를 읽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이전에 나온 김수임에 관한 기록물들은 한결같이 그녀의 비극이 공산주의자 이강국을 진심으로 사랑해서였거나, 그 사랑 때문에 이강국에게 이용당한 결과로 해석해 왔다. 그런데 그 소설은 오히려 그녀가 미군 헌병사령관 베어드를 사랑하였고, 그 사랑을 지키려고 이강국을 달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 입양된 김수임과 베어드의 아들을 등장시키고 ‘베어드 조사보고서’와 아울러 그로부터 몇 년 뒤에야 우리 사회에 알려진 ‘실리 보고서’까지 암시하며 오히려 김수임과 이강국이 베어드에게 활용된 듯한 인상까지 풍겼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 글을 읽으며 김수임에게서 한국판 ‘마타하리’로서의 통속적인 비극성보다 더 순도 높고 파괴력이 큰 비극성을 느꼈다. 불행한 식민지의 딸에서 의사인 미국인 양어머니를 통한 구미(歐美) 문명과의 조우, 그리고 이강국을 만나 혁명가의 연인이 되지만 다시 그가 사라진 자리에 홀연히 나타난 아메리카 제국의 헌병사령관 베어드와 되살아난 유년의 환상. 거기서 김수임이 운명적인 사랑의 화신으로 전환되고 그 나락에 스스로 몸을 던짐으로써 비극성은 고조된다…. 대강 그런 형태로 구상하면서 한동안 김수임의 생애를 내 나름으로 추적해 본 적이 있었지만, 극화(劇化)에는 끝내 이르지 못했다. 지명도 높은 소재이기는 해도 또한 이미 여러 번 연극이나 영화로 다루어진 소재여서 부담도 많았다.



 그런데 김수임의 생애를 추적하는 중에 나는 이강국에 대해 세밀히 조사하게 되었고, 이강국에 관한 지식이 늘어가면서 나는 다시 그와는 동향에 동창이고 친구 사이인 임화까지 살펴보게 되었다. 그래서 비록 그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지는 못해도 어렴풋하게나마 임화의 삶에서 감지되는 화려한 비극성만은 인상 깊게 기억해 왔는데, 갑자기 배영기가 나타나 임화의 딸 이야기로 나를 자극했다.



 배영기에게서 자극을 받은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나는 혜련이 한국 현대사에 그리 밝지 못해 그런 주제가 절실하게 가슴에 다가들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뜻밖으로 혜련도 배영기가 구상하는 창작뮤지컬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배영기가 처음 얘기를 꺼내던 날부터 그런 조짐이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혜련은 임화의 딸에 깊이 빠져들어갔다. 그러다가 우리들의 첫 학기가 끝날 무렵에서는 배영기보다 더 심각하게 주제를 확장시켜 갔다.



 “그건 그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만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식민지의 딸, 혁명가의 딸 이야기만도 아닌 듯하네요. 조국이나 이념의 얘기면서 한국에 미국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실존과 주체성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잘 발전시키면 아주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 거예요. 어때요? 이 각본, 완결되면 차라리 선생님이 한번 맡아 무대에 올려보시지 않으시겠어요? 실은 저도 벌써부터 음악을 구상해 보고 있어요. 이번에는 어디 호흡 잘 맞는 작사가가 있으면 작곡에도 끼어들고 싶을 정도로.”



 드디어 우리가 정한 백일 학기가 끝나 또 우리끼리의 자축 파티에 혜련이 그렇게까지 열심을 드러냈다.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배영기가 넙죽 받았다.



 “그 작사가는 내가 될 것 같은데…. 뮤지컬 각본이란 게 가사 빼면 몇 줄이나 되겠어요? 그러나 처음부터 내가 작사를 해낼 자신은 없고, 그래서 생각한 게 시극(詩劇) 형태인데 앞으로 좀 지도해 주세요. 자수율(字數律)과 박자의 관계라든가 멜로디에 대응하는 실사(實辭)와 허사(虛辭)의 위치 같은 거….”



 “잘한다, 잘해. 둘이서 아주 공연기획단을 꾸며라. 아니면 아예 극단을 하나 만들든가.”











 두 사람이 주고받는 게 너무 손뼉이 잘 맞는 데에 공연히 심술이 나서 그렇게 핀잔을 주기는 했지만, 나도 그때는 이미 그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져 있던 때였다. 그런 내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배영기가 이죽거리는 말투로 받아쳤다.



 “괜히 마음에도 없는 어깃장 놓지 마시고 성님도 이제는 우리 기획단에 들어오슈. 아주 단장 자리에 앉혀드릴게. 우리끼리니까 하는 소린데, 이거 터뜨리기만 하면 대박날 거유.”



 그래놓고는 갑자기 말투를 바꾸어 진지하게 물어왔다.



 “진작에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아직 구조 다 잡히지 않아서 망설였던 거예요. 정말로 이거 한번 무대에 올려보지 않겠어요?”



 그 말에 나도 쓸데없는 허세나 오기 부리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우선 네 극본이 어디까지 진척되었는지 궁금하다. 실은 나도 느낌으로는 뭔가 세차게 가슴을 후려치는 듯한 감동 같은 것을 그 이야기 구석구석에서 느껴왔다….”



 “2막에 각 10장으로 잡고 있어요. 지금 시제(時制)는 서막 말고는 과거로부터 역순(逆順)으로 가기로 하고. 그런데 비극적인 장(場)보다는 그 비극성을 증폭시킬 장엄하고 화려한 배경이 될 장들이 더 어렵군요. 하지만 이제 서너 장만 채워넣으면 우선 전체적인 모양은 나올 겁니다.”



 배영기도 나와 같은 진지함으로 대답해 주었다. 이번에는 내 쪽에서 너무 정색하고 얘기하는 게 싫어 어조를 약간 가볍게 했다.



 “그럼 다 만들어 놓고 봐. 아니면 나도 원작자로 끼워주든지. 오늘은 우선 길거리 학교 기말 쫑파티나 하고.”



 그때 혜련이 끼어들었다.



 “기말 쫑파티라면 다음 학기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 거리에서 다시 한 학기 더 가실 거예요? 이만하면 이 뉴욕바닥은 돌 만큼 돈 것 같은데….”



 “뭐 복습이라는 것도 있고 기획, 연습, 홍보 따위 무대 이면 중심으로 하는 심화학습도 있지. 왜 벌써 여기서는 볼 장 다 본 것 같아?”



 “그럼 이 길거리 대학에서 극단 경영 공부까지 다 하고 가자는 거예요? 그건 너무 막막할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 해야 덜 막막할 것 같아?”



 내가 다시 정색을 하고 그렇게 묻자 혜련이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우리가 먼저 공연기획을 만들어 거기따라 분야별로 점검하며 채워나가는 것도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구체적인 공연기획이 있으면 선택과 집중이 쉬워지고 학기를 더 늘리지 않아도 필요한 노하우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돌아가자마자 바로 할 일도 생기고….”



 그런데 그 ‘돌아가자마자’란 말이 이상하게 감동을 주어 나를 한층 더 진지하게 만들었다.



 “지금 한국으로 돌아가는 얘기를 하는 거냐? 그렇지, 돌아가야지. 언제까지 이 넓은 길바닥을 헤매고 다닐 수는 없지….”



 나는 자신도 모르게 감상적이 되어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속을 털어놓고 말았다.



 “그래, 돌아가서 첫 번째 연출로 뮤지컬을 해야 한다면 그건 창작 뮤지컬이어야 되겠지. 그것도 엔터테인먼트 쇼 스타일은 안 되고. 그렇다면 저 비행기 녀석이 지금 한창 열 올려 마무리짓고 있는 우리 ‘혁명의 딸’보다 더 나은 각본을 얻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좋아, 그럼 다음 학기 커리큘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그러고 보니 복습이니, 심화학습이니 하는 것은 나에게도 너무 유장하게 들리기는 하네.”



 “보아하니, 영영 일치가 안 될 얘기 같지도 않군요. 자, 그럼 우선 머리에 윤활유나 좀 치고 합시다.”



 그때 갑자기 배영기가 끼어들어 술잔을 흔들며 마시기를 재촉했다. 그리고 한동안 활발하게 이것저것 논의하다가 어렵잖게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결말이 예상보다는 좀 엉뚱했다.



 ‘다음 학기 우리 길거리 대학의 커리큘럼은 가제 ‘혁명의 딸’ 공연 기획으로 전환한다. 다음 학기는 한국에 있는 극단 ‘아우라’의 기획팀에서도 한둘 추가로 참여하고, 캠퍼스는 영국으로 이동한다. 런던의 길거리 대학으로 가되, 인근 유럽 도시의 명품 오페라도 심화학습 교과에 넣는다. 단 다음 학기는 반드시 백일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나중에 취한 비행기가 건들거리며 요약한 내용은 대강 그랬다.



이문열 소설가

일러스트: 백두리 baekdur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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