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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현실에 가위 눌린 두 남녀의 기나긴 하루









지하의 시간들

델핀 드 비강 지음

권지현 옮김, 문예중앙

280쪽, 1만1000원




천재 소녀와 노숙자 소녀 사이의 우정을 그린 성장소설 『길 위의 소녀』로 국내에 소개되었던 저자의 2009년 작이다.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다.



 델핀 드 비강의 작품 세계는 기욤 뮈소, 안나 가발다, 마르크 레비 등 우리에게 친숙한 프랑스 작가들과는 사뭇 다르다. 막연한 동경과 우연으로 포장해 사랑을 낭만화하거나, 한때 한국문학도 경험했던 이른바 ‘내향적 미학주의’류의 소설들처럼 인간 내면의 미세한 기미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하지 않는다. 섬세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오히려 주된 관심사는 사회적인 쪽으로 흐른다.



 이번 소설에서도 그런 특징은 확인된다. 여성 주인공은 40세의 커리어 우먼 마틸드, 남성 주인공은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초동(初動) 조치하는 파리응급의료센터의 43세 의사 티보다. 두 사람이 겪은 5월 20일 하루 동안의 경험, 둘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고통과 상처의 기억 등이 소설의 뼈대다. 공교롭게 둘은 이날 똑같은 시각, 새벽 네 시에 하루를 시작한다. 마틸드는 잠을 설친 침대 위에서. 티보는 호텔 객실 화장실 변기 위에서. 소설 마지막 장면, 퇴근 무렵 지하철에서 둘은 마주치기까지 한다. 하지만 타인으로 스쳐 지나갈 뿐, 둘 사이에 운명적인 사랑 같은 건 없다. 그런 점에서 보다 현실에 가까운 프랑스 소설이다.



 소설은 마틸드를 다룬 장(章)과 티보를 다룬 장을 속도감 있게 교차하며 두 사람의 사연을 이어나간다. 보다 비중 있게 다뤄지는 쪽은 마틸드다. 그에게 닥친 고통은 ‘직장 내 상사의 폭력’이다. 물론 여기서 폭력은 육체적인 폭력이 아니다. 한때 마틸드는 상사인 자크의 총아였다. 저돌적이고 다혈질적이며 까탈스럽기까지 한 자크가 마틸드의 능력만큼은 높이 샀다. 자크의 울타리 안에 머물 때 마틸드는 승승장구,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이었다. 하지만 마틸드가 울타리를 벗어나 홀로 서려고 하자 자크는 집요하고 가혹하게 응징한다. 힘과 술수로 마틸드의 권한을 서서히 빼앗아 끝내 사표를 내게 만든다. 마틸드의 몰락 과정은 처절할 정도다. 이를 통해 소설은 선의와 상식에 기대 인간적인 관계가 지속되리라는 믿음이, 경쟁과 이익 실현이 지상과제인 다국적 기업 내에서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묻는 듯하다. 그런 직장 내 현실이 소설 속에서만 그치는 게 아닐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소설이 전하는 바는 의미심장하다. 부드러움 속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어 독특한 소설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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