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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가사의 (8) -한국인의 미소 마애불

한반도에 있는 山寺의 한 ‘양식’으로 꼽을 만한 마애불. 한국인들은 그 마애불 앞에서 무엇을 기원해 왔을까. 삼국시대 법화사상·미륵사상, 통일신라의 밀교, 고려의 미륵신앙, 조선의 현세구복적인 칠성신앙….
1천5백년 한국인의 의식기류에 흐르는 거대한 신앙체계의 뿌리와 마애불의 관계를 조망한다.

충남 '서산 마애삼존불'(국보 84호)
. 백제 후기의 불상으로 조각기법이 뛰어나다. 백제인의 온화하고 낭만적인 기질을 엿볼 수 있는 얼굴로 빛의 각도에 따라 웃는 모습이 다양하게 변한다.
마애불은 불교의 ‘예배존상’을 천연 암벽에 새겨놓은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예배굴이 만들어지면서 나타난 마애불은 불교가 전파된 경로를 따라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까지 유입됐다.

인도와 중앙아시아는 기후가 더운 곳이어서 예배나 수행하기에 적합한 석굴들이 많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중국으로 전파된 것은 5호16국시대와 그후의 남북조 시대로, 이 시기 중국에서도 석굴이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중국에는 특히 허베이(河北)
성 대동의 ‘운강석굴’과 허난(河南)
성 낙양의 ‘용문석굴’, 산시(山西)
성의 천룡산석굴, 장쑤(江蘇)
성 남경 교외에 위치한 서하사(棲霞寺)
천불동 등 규모면이나 불상의 수에 있어서 가히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석굴사원들이 남아 있다.

사실 한반도에서 인도와 중국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거대한 석굴사원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혹자들은 1천6백여년의 불교역사를 가진 우리가 그같은 석굴사원 하나 없는 데 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우리의 종교적인 정열이 부족해서일까.

한반도 각지에 산재해 있는 마애불들은 그 질문에 분명히 답하고 있다. 견고한 화강암을 깎아 만든 1천여에 달하는 마애불상이 오랜 비바람의 풍화를 견디고 묵묵히 남아 있는 것이다.

◇한반도에만 나타나는 ‘화강암 마애불’

경남 '함양 마천면 마애여래 입상'(보물 375호)
. 고려시대 거불조각의 하나로 통일신라 말기 불상양식의 영향을 받아 미륵신앙과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 마애불은 기후가 좋고 화강암이 풍부한 자연환경 때문에 인도나 중국에서처럼 석굴을 깊이 파들어가 조각하기보다 보통의 암벽에 불상을 새겨 놓았다. 이에 비하면 인도와 중국은 특히 재질이 무른 사암(砂岩)
과 석회암이 풍부해 비교적 손쉽게 석굴과 마애불을 조성할 수 있었다.

한반도 특유의 화강암은 한편으로 불상의 제작과 석굴을 만드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했지만, 독특한 불상양식과 마애석굴 형식을 낳게 한 셈이다. 중국과 한국· 일본을 통틀어 화강암 마애불은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암벽 마애불 위로 다시 목조 가구를 올려 전각(殿閣)
형태를 꾸미는 마애불 형식도 한반도에서 유행한 양식이었다. 말하자면 한국적인 석굴사원인 셈이다. 금동이나 흙·목조 불상들이 전란으로 파괴되고 소실돼 오늘날까지 전하는 경우가 적지만 마애불과 석불은 오히려 세월의 부침을 견뎌내고 과거 융성했던 우리 불교의 역사를 묵묵히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다. 금동불의 경우 이동이 가능해 출토지를 제작지로 보기 어렵지만 마애불상은 현재 있는 그 지역에서 제작된 것이어서 한 지역 불교조각의 성격과 불교신앙을 이해하는 데 가장 뚜렷한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산재한 마애불의 분포상을 편년(編年)
에 따라 살펴보자.

우선 삼국시대 마애불은 대부분 정치적인 중심지나 교통의 요지에 해당하는 지역에 조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경우, 중국과 바닷길을 통해 왕래가 빈번했던 충남 서산이나 태안에 마애불이 있고, 신라도 왕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삼국통일 무렵부터는 북쪽 길목에 해당하는 봉화·영주지방에 조성돼 있다.

신라 중기까지 경주 일대와 경상도 지역에서 주로 조성되던 마애불은 통일신라 이후 각 지방으로 퍼져 나갔다. 호족들이 할거하고 불교가 일반인들에게 널리 확산되면서 중앙지역을 벗어나 충청·전라도 지역으로 파급되었던 것이다.

나말려초의 후삼국시대에 이르면 오히려 신라지역보다 후백제와 고려의 강역에 해당하는 충청도와 전라도·경기도 지역에서 마애불 조성이 오히려 활발하게 나타난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마애불은 전국적으로 퍼져 그 형식에서도 훨씬 다양한 모습들을 띤다. 이렇게 볼 때 마애불은 불교 대중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것이다.

고려시대까지의 마애불상들은 대부분 당대 최고의 조각장인들의 솜씨로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비록 조각가의 실명이 전하지는 않지만 국가적으로 불교를 지원하고 신앙하였던 시기여서 우수한 조각가들이 불교조각에 적극 참여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성리학적인 유교문화가 사회 전 반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유했던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불교가 국가적으로 억압당하던 형편인지라 조상(造像)
활동이 그만큼 위축되었다. 이 시기의 마애불은 수적으로도 미약할 뿐더러 조각 수준도 상당히 떨어지게 되었다.
이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제작된 마애불 가운데 현존하는 대표적 상들을 시대별로 살펴보기로 하자.

◇백제인의 미소, 신라 화랑과 미륵신앙

삼국시대의 마애불로 잘 알려진 충남 태안의 마애삼존불이나 서산 마애삼존불은 6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태안 마애삼존불 입상은 서해바다가 바라보이는 백화산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이다. 불상의 어깨가 장대하고 얼굴에도 살이 많은 것으로 봐서 중국 북제에서 수에 걸쳐 유행한 이른바 제·수(齊隋)
양식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삼존의 형식을 보면 중앙에 불상, 좌우에 보살상이 있는 일반적 구도와 달리 두 손으로 보주(寶珠)
를 감싸쥔 보살 입상이 중앙에 있고 보살상의 오른쪽에는 시무외 여원인의 통인(通印)
의 손 모습을 한 불입상이, 왼편에는 손에 보주(혹은 盒)
를 든 불입상이 배치된 특이한 구도이다. 삼존불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데, 보주를 든 현재불인 석가불과, 나란히 대칭되게 서 있는 과거불인 다보불(多寶佛)
사이에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삼존 형식을 이룬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 마애불은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인 “법화경” 사상을 근거로 조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산마애삼존불도 본존 불입상의 좌우에 반가사유상과 보주를 든 보살 입상이 각각 새겨져 역시 일반적인 대칭구도의 삼존불과는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태안 마애불보다 좀더 세련된 조각기법을 보이고 있고 백제조각의 우수성과 온후한 느낌을 전해 준다. 이 삼존불 중앙 본존불상의 상호(相好)
는 원만하고 온후한 인상으로 백제인의 미소를 느끼게 한다. 또 왼편 보살 입상의 얼굴에 나타난 부은 듯한 눈가와 광대뼈, 인중 주변이 약간 돌출한 미소 띤 입가의 표현은 인간적이고 소박한 백제인의 얼굴을 연상시킨다. 반가사유상의 얼굴은 동안(童顔)
이며 순수하고 해맑은 얼굴로 사유에 들어있다.

미륵신앙은 특히 삼국시대에 널리 유행했다. 미륵보살은 56억7천만년 후 도솔천에서 내려와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여 3회의 설법을 통해 석가모니 재세시(在世時)
에 성불하지 못한 중생들을 성불하게 한다는 미래불이다. 명문이 남아 있어 조상 발원의 내용을 알 수 있는 고구려의 불상들에 잘 나타난다.

‘계미명(癸未銘)
금동삼존불 입상’이나 ‘경4년 신묘명(辛卯銘)
금동삼존불 입상’의 발원자들은 부모나 스승을 위해 아미타불을 조성하면서도 다음 생에 함께 태어나 미륵보살의 법문을 듣기를 원하고 있어 당시 미륵신앙이 일반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가를 암시해 준다.

이 점은 신라 지역의 마애불인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과 중원군 가금면 햇골산 마애불상군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경주시 건천읍의 단석산 우징골의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단석산 마애불상은 네개의 바위가 서쪽만 트이고 동·남·북면에 세워져 천연적으로 ㄷ자형 석실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새겨진 조각이 10구나 된다. 남쪽 바위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 석실의 명칭이 신선사(神仙寺)
이며 이곳에 새겨진 존상은 미륵삼존임을 알 수 있다. 북쪽 바위에 새겨진 본존 미륵불은 크기가 7m에 달하는 대불(大佛)
로 둥근 얼굴에 가사를 입은 앞가슴이 넓게 열리고 두 손으로 시무외 여원인의 수인을 결(結)
하고 있는데 조각기법은 백제 지역의 서산마애불에 미치지 못하고 미숙하다. 이 마애불조각에서 가장 흥미있는 것은 북쪽 바위 상단에 얕은 부조로 새겨진 세 구의 불상이 모두 왼쪽으로 손을 뻗어 옆에 있는 반가사유상을 가리키는(또는 맞아들이는)
자세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반가상을 강조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를 신라의 화랑도와 미륵신앙의 관계를 통해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아직은 어린 청소년이지만 장차 성장하여 신라를 이끌어 나갈 화랑들은 미륵의 이미지와 맞물려 용화(龍華)
향도로 불렸는데 미륵불이 하강하여 성불하는 곳이 바로 용화수(龍華樹)
아래이므로 용화는 곧 미륵을 가리킨다. 이곳 신선사의 신선 또한 화랑의 화신인 미륵선화(彌勒仙花)
를 의미한다고 본다면 신선사의 미륵불과 반가사유상 조성의 사상적 배경이 된 것은 신라에서 융성하였던 미륵신앙이라고 하겠다.

충북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 햇골산에도 미륵신앙의 일면을 나타내 주는 마애조각군이 있다.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마애불상군은 본존불과 공양상·반가사유상을 본존으로 한 좌우의 협시상들, 윗쪽 절터(寺址)
의 마애불 좌상의 세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두번째 그룹인 반가사유상과 좌우의 협시상은 앞의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에서와 같이 반가사유상으로 표현돼 미륵 신앙을 나타낸다.

◇밀교적 성격의 통일신라 마애불

충북 '보은 법주사 마애불(보물 216호)
.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倚像의 미륵불상이다. 전체적으로 평면적이지만 세부조각이 회화와 조각을 합친 것처럼 섬세하다.
신라 중기의 마애불은 다른 석불들과 함께 신라 조각의 절정을 보여준다. 경주를 중심으로 경북 일대에 많은 불상이 퍼져 있다. 이 가운데 삼국통일 무렵 조성된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상은 고신라의 단석산 마애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조각기법이 뛰어나다. 본존불은 고부조(高浮彫)
로 양감이 풍부할 뿐더러 거의 원각상(圓刻像)
과 같은 느낌을 준다. 원만한 불안(佛顔)
에 살이 많고 이목구비의 표현도 큼직하며 가사의 옷주름 역시 굵고 무게 있게 흐른다. 협시보살의 얼굴도 통통하게 고부조되었으며 왼쪽 협시보살은 신체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당나라 초기의 불상양식이 나타난다.

통일신라 중기의 대표적 마애불로는 8세기 중엽에 조성된 경주시 북쪽 소금강산의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면석불과 경주 동남산의 칠불암(七佛庵)
마애삼존상을 꼽을 수 있다.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이름은 “삼국유사”에서 유래한다. 경덕왕(742∼765)
이 백률사에 행차하기 위해 산 아래 이르자 땅 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파보게 하니 큰 돌이 나왔는데 그 네 면에 사방불이 새겨져 있어 이곳에 절을 짓고 ‘굴불사’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사면불의 서쪽 바위에는 서방 극락정토의 교주인 아미타불상과 관음 대세지보살의 삼존불 입상이 새겨져 있고 동면에는 약사유리광세계의 교주인 약사불 좌상, 남면에는 현 사바세계의 교주인 석가모니불, 북면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과 11면6비관음보살이 새겨져 있다. 이 사방불은 어떤 특정 경전을 근거로 하여 제작된 것이 아니고 당시 신라에서 널리 신앙되던 네 부처를 모두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칠불암 마애불상도 사방불을 포함하고 있다. 경주 동남산(東南山)
봉화곡의 커다란 암벽 위에 삼존상이 새겨져 있는데 그 앞에 있는 사각형 바위의 네 면에 불상을 한구씩 새겨놓았다. 이 불상들은 사방불이고 삼존불은 중앙불로 생각되기도 한다. 삼존불은 고부조(高浮彫)
로 조각되었으며 본존상은 장대하고 위용이 넘치는 체구에 오른손을 내려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의 수인을 하고 있다.

이 밖에도 경주 남산 용장사지 마애불 좌상,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 반가상 등은 대표적인 신라 중기의 마애불로 꼽히는데 이 시기의 마애불들은 시대를 통틀어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된다.

통일신라 말기에 접어들며 마애불은 중기의 마애불과 달리 경주지역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도 나타난다. 그런 만큼 조각기법상 수준이 떨어지고 규모는 전에 비해 상당히 거대해진다. 이 시기에 거불(巨佛)
들이 조성된 것은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에 근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경전에서 부처의 크기가 1장6척인 데 비해 미륵불은 1백60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말려초에 미륵신앙이 유행하면서 자연스럽게 거불들이 조성된 것이다.

충남 홍성의 용봉사 입구에 있는 마애불 입상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불상으로 보인다. 이 입상은 정원(貞元)
15년(799)
에 조성됐는데 얼굴은 수평으로 가늘게 뜬 눈과 작은 입이 표현됐고 평평한 신체와 도식적인 옷주름 등은 상당히 지방적인 양식을 띤다. 경주 윤을곡 마애삼불도 태화9년 을묘(乙卯·835년)
에 조성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각 불상의 비례감이 떨어질 뿐더러 조각의 깊이가 얕고 평면적이어서 기법상에서는 오히려 후퇴한 모습을 보인다.

같은 시기에 민간에서는 약사불을 통해 현실세계에서의 구원을 바라는 약사신앙도 나타난다. 801년에 조각된 경남 함안 방어산의 마애약사삼존상은 커다란 바위면에 약사불과 좌우협시인 일광보살, 월광보살을 선각으로 새겨 놓았다. 통일신라 말기는 시기적으로 기층민들이 가뭄과 기근·질병에 시달렸던 시기인 만큼 약사불이 조성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규모가 거대한 마애불로 경주 남산 약수계 마애불 입상과 월성 골굴암 마애불상을 예로 들 수 있는데 불상의 몸을 거대한 암벽에 조각하고 머리 부분은 따로 만들어 끼워 넣은 형태다. 그러나 약수계 마애불 입상은 현재 머리부분이 유실된 채 연결부에 구멍이 뚫려 있다. 이밖에 골굴암(骨窟庵)
은 감은사에서 기림사로 가는 길에 있는데 높은 석회암 절벽에 석굴이 12개가 패 있으며 가장 위쪽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19세기 정시한(丁時翰)
은 “산중일기”에서 이 12개 석굴을 언급했는데 법당굴·설법굴 등으로 불리며 각 굴에서 승려들이 수도중이라고 적었다.

◇고려의 미륵신앙과 마애불

북한산 구기리 마애석가여래 좌상(보물 215호)
.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국내에서 보기드문 거불이다. 바위면에 연꽃대좌를 새겨 놓았고 좌우에 뚫린 구멍은 목조 가구를 설치했던 것이다.
거대한 마애불은 나말려초와 후삼국에 와서 태봉의 궁예나 후백제의 견훤이 미륵하생신앙을 내걸고 민심을 이끌면서 다수 조성되었다고 생각된다. 후삼국의 군주들은 미륵신앙을 열렬히 지지했고 특히 궁예는 자신이 바로 중생 구제를 위해 도솔천에서 내려온 미륵불이라는 이미지를 백성들에게 심어 주려고 하였다. 견훤이 자신의 아들들에 의해 유폐당했던 사찰이 미륵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법상종 사찰인 금산사였던 점은 당시 후백제에서 성행했던 미륵신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와 같은 신앙적 분위기는 고려시대에도 이어져 홍성 신경리 마애불 입상이나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불 좌상, 함양 마천면 마애불 입상, 법주사 마애불 의상,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상 등 거대한 불상들이 조성되었다.

홍성 신경리 마애불 입상은 용봉산 정상의 탁트인 평지를 향해 서 있는데 마애불의 표정이 온화하고 양감이 좋으며 얼굴에서 상체까지의 조각이 입체적인 반면 하체의 조각은 균형을 잃은 듯 약화되어 있다.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의 마애불 좌상은 방형의 얼굴과 장대한 신체의 비례가 알맞고 전체적으로 장중한 불격(佛格)
을 나타내는데 마애불 위에 목조 전실을 달아 불전(佛殿)
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보은 법주사 마애불은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보이는 의상(倚像)
의 미륵불상이어서 주목된다. 전체적으로 평면적이지만 세부조각이 회화에서 같이 섬세하게 처리되어 있다.

또 고려 초기의 마애불로서 10세기 조각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예로는 하남시(옛 廣州 교산리)
의 마애약사불 좌상과 북한산 구기동의 승가사 마애불 좌상을 꼽을 수 있다. 앞의 약사불은 조각의 깊이는 얕은 편이지만 광배와 불상, 대좌의 비례가 적절하고 조각기법이 섬세한데 태평 2년(977)
이라는 명문이 있어 조성 시기를 알 수 있다.
승가사 마애불은 장대한 체구에 엄숙한 얼굴, 항마촉지인의 수인(手印)
등에서 하남시 하사창동에서 출토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철불좌상(廣州철불)
과 같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석굴암 본존상의 형식을 따르고 있어 고려의 중앙양식을 따른 상으로 생각된다. 또 다른 고려시대 마애불로는 삼천사지(三千寺址)
마애불 입상이 있다. 이 마애불은 얼굴 부분만 사실적으로 얕게 부조되었고 광배나 가사 주름·대좌 등 나머지 부분은 모두 융기된 선으로 양각되어 있는 특이한 기법으로 조각되었다.

대부분의 마애불에서처럼 지금은 불상 앞의 전실이 없지만 목조 가구(架構)
를 박았던 커다란 방형의 구멍이 마애불 좌우에 남아 있다. 또한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은 “법화경” ‘견보탑품’에서 보이는 석가불와 다보불(多寶佛)
의 두 부처가 나란히 표현된 예인데 이러한 이불병좌상은 중국에서는 크게 유행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드물다. 이 마애불은 지면에서 상당히 높은 바위면을 깊이 파 감실(龕室)
과 같은 공간을 만들어 새겼으며 조각 위에 채색한 흔적이 남아 있어 흥미롭다.

이 외에도 현재 전하는 고려시대의 마애불은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다. 불교가 고려시대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던 만큼 당시 불교 조각의 수요가 컸을 것이고 크고 작은 마애불들이 예배의 대상으로 다수 조성되었을 것이다. 이 가운데는 우수한 조각 기법을 보이는 불상도 있지만 조각 수준이 떨어지는 예도 많다. 그러나 조각의 우수함에 관계없이 이 마애불들은 고려시대 불교문화를 이해하는 데 더없이 귀중한 자료라고 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마애불들은 고려시대에 비해 그 수도 현격히 적고 조각 기법도 떨어지지만 숭유억불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불교가 민중들과 함께 숨쉬며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 왔음을 알려준다. 서울 봉천동 관악산의 마애불 좌상은 명문에 숭정 3년(1630)
에 조성된 ‘미륵존불’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연꽃 봉오리를 든 불좌상을 바위에 선각하였다. 불상을 선각한 선묘는 힘이 있거나 긴장감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유려하고 섬세한 편이다.

◇조선시대 칠성신앙과 마애불

같은 관악산에 있는 안양시 석수동 삼막사 칠성각의 바위에 새겨진 마애삼존불 좌상은 1763년에 조성된 치성광불삼존상으로 본존상은 보륜(寶輪)
을 손에 든 치성광불(熾盛光佛)
이고 좌우 협시보살은 일광·월광보살이다. 치성광불은 칠원성군, 즉 칠성(七星)
의 주존으로서 득남(得男)
, 무병장수 등 현세구복적인 발원을 이루어준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회화에서 칠성도는 여러 점 전하지만 조각으로 치성광불을 새긴 예는 드물어 이 마애삼존불은 조선 후기에 널리 유행하였던 칠성신앙을 보여주는 귀중한 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마애불은 시대에 따라 양식은 물론이고 조상의 배경이 되었던 불교신앙의 성격을 달리하였으며 마애불의 분포상도 변화하였다. 삼국시대 마애불에서는 법화사상이나 미륵사상이 많이 나타나고 통일신라 시대부터는 밀교적인 성격을 띠는 사방불을 비롯하여 아미타·약사·석가·관음보살 등 대승불교의 여러 부처와 보살이 마애불의 주제가 되었으며, 나말려초를 지나면서 미륵신앙의 유행으로 거대한 미륵불의 조성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마애불 조성의 전통은 고려·조선을 거쳐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때로는 미륵불이, 때로는 아미타불이, 혹은 약사불이 바위에 새겨져 수많은 중생들의 참배를 받으며 그들이 사바세계의 고해(苦海)
를 건널 수 있도록 교량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우리가 관광이나 답사 등을 통해 대하게 되는 전국 각 지역의 마애불을 단순히 옛 조상들의 흔적으로서가 아니라 그 역사적, 신앙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감상한다면 우리 조상들의 삶과 신앙에 대해 좀더 깊은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최성은 덕성여대 교수

월간중앙(http://win.joongang.co.kr) 제 288호 199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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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