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안정복의 동사강목 “단군 이야기는 허황, 이치에 안맞아”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김운회의 新고대사: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만주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각저총(角抵塚) 벽화. 두 장정이 씨름하는 왼쪽 구석에 작은 호랑이와 곰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고구려 시대에도 단군신화가 이어졌다고 주장하게 되는 유명한 벽화다. 그러나 곰과 호랑이는 만주 지역을 대표하는 토템이어서 이를 무조건 단군신화와 연관시키는 것은 지나치다. 이 벽화는 중국 측의 관리 소홀로 크게 훼손됐다(오른쪽 작은 사진). 김운회 교수 제공







②단군신화와 한민족



단군은 누구일까. 풍백과 우사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와 웅녀와 혼인하고 나라를 만든 국조(國祖)일까. 그게 진짜 고조선의 건국 신화일까. 이런 물음은 ‘단군신화’를 한민족의 뿌리 신화로 생각하는 이들에겐 모독일 것이다. 단군이 한민족만의 신화라면 이상하다. 한반도 국가였던 고구려·백제·신라는 단군신화에 침묵한다. 그리고 1000년 지나 조선조에 와서 꽃을 피운다.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사서는 뜻밖의 사실들을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의 사서에서 단군신화는 종잡을 수 없는 모습으로 처음 나타난다. 삼국사기는 “(247년, 고구려 동천왕은 환도성에 병란을 겪어 평양성에 성을 쌓고 종묘사직을 옮겼는데)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의 집이다. 또는 왕의 도읍 터인 왕검이라고도 한다.”(“平壤者, 仙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 三國史記 高句麗本紀東川王)고 적는다. 또 1325년(고려 충숙왕)에 쓰인 조연수묘지(趙延壽墓誌)에서는 “평양의 선조는 선인왕검인데 … 평양 군자는 삼한 이전에도 있었고 천 년 이상을 살았다니 어떻게 이처럼 오래 살면서 또한 신선이 되었는가?”(平壤之先仙人王儉 … 平壤君子 在三韓前 壽過一千 胡考且仙)라는 기록이 있다.



‘선인왕검’이 누군지 알기는 어렵지만 ‘왕검’이란 표현 때문에 대체로 단군과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이 ‘선인왕검’은 광범위한 고조선의 역사를 말하기보다 평양 지역과 관련된 인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러면 단군이라는 존재는 평양의 지신(地神)이나 씨족신(氏族神) 정도의 인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단군은 본래 한민족이 간직한 단군신화라고 볼 수 없다.









중국 산둥성 가상현 제령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의 벽화①. 은나라 왕의 후손으로 알려진 무영(武榮)의 묘다. 벽화엔 귀인이 천마를 타고 내려와 동쪽으로 가는 모습②, 곰과 호랑이 그림들④이 있다(붉은 사각형 내). 『삼국유사』에 나타난 단군의 모습과 흡사해 단군신화의 살아있는 증거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벽화는죽은 무씨의 승천을 그린 것이며 곰은 잡신을 몰아내는 것이란 해석도 있다. 또 곰·호랑이 외에 많은 다른 동물들②③이 나와 단군신화를 말하기엔 무리란 지적이 나온다. 김운회 교수 제공





단군(檀君)이 ‘국조’로 최초로 나타난 기록은 잡기류(雜記類)인 삼국유사와 시문집(詩文集)인 제왕운기다. 삼국유사에는 “옛 기록(古記)에 하느님의 아들 환웅(桓雄)이 내려와 곰과 교혼하여 단군이 태어나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朝鮮)을 세웠다고 한다(三國遺事 卷1)”고 기록돼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최초에 누가 나라를 열고 풍운을 이끌었는가? 석제의 손자로 그 이름은 단군이라. 요임금과 함께 무진년에 흥하여 … 은나라 무정 8년에 아사달 산신이 되었다(初誰開國啓風雲 釋帝之孫名檀君 竝與帝高興戊辰 … 於殷虎丁八乙未 入阿斯達山爲神)”라고 한다. 제왕운기는 이승휴(李承休)가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한시(漢詩) 형식으로 쓴 서사시다.



이 두 책은 모두 13세기 후반에 저술된 것이다. 그 이전에 한국사의 주체들이 단군과 관련해서 역사를 서술한 증거들을 찾기 어렵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는 위서(魏書) 고기(古記)등을 인용하지만 실제로 정사인 위서엔 단군신화가 없고 고기는 정확히 어떤 사서들을 말하는지 알기 어렵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검증할 만한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안정복은 “동방의 고기 등에 적힌 단군 이야기는 다 허황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고기에 나오는 환인제석(桓因帝釋)이라는 칭호는 법화경에서 나왔고, 그 밖의 칭호들도 다 중들 사이의 말이니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 불교를 숭상하여 나타난 폐해가 이 지경이 된 것이다(安鼎福 東史綱目第1上)”라고 했다. 정약용(丁若鏞)도 “단군이 평양에 도읍을 했다는 것은 믿을 만한 문헌자료가 없는 형편인데, 하물며 단군의 이름이 왕검이라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 억지로 꾸며낸 것이다”(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라고 하였다.



단군을 강화하는 현상은 고려 후기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몽골 제국과의 항쟁기에 쓰인 단군본기(檀君本紀: 현재는 소실)에서는 “신라, 고구려, 남·북 옥저, 동·북부여, 예, 맥 등은 모두 단군의 자손(壽)”이라고 했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삼한 70여 국의 군장은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민족적 정체성을 새롭게 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이데올로기는 될 수 있지만, 과학적·역사적 증거는 될 수 없다.



단군신화가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출발하기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백제·신라 그 어느 나라도 역사적 출발을 단군신화의 배경이 되는 고조선과 함께하지 않고 고조선과 어떠한 친연성도 나타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이들 삼국이 그 스스로를 고조선과 연관시키는 그 어떤 기록도 없다.



단군이 민족 전체의 시조로 확실히 받들어진 때는 고려 후기로, 그 기점은 몽골(원)의 세계 지배와 관련이 있다. 교원대 송호정 교수는 “고려인들이 단군에 대해 인식한 것은 몽골의 침입과 간섭을 받으면서부터였다”고 지적한다. 즉 고려 조정에 반감을 가졌던 세력이 새로운 민중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여 단군신화를 채택했다는 것이다.



조선 초에 단군신화를 강조하고 그를 통해 새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다면 민간에 이미 단군이 인기 있는 신앙의 대상이었다는 말이다. 조선 초기엔 정부 차원에서 단군신화를 정치이데올로기로 철저히 이용하려 했던 기록들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조선의 태조 13년 예조에서 올린 상서에서 “이성계를 단군 기자와 함께 중사(重事)할 것”을 주장했고 예조전서 조박(趙璞)은 “단군을 실존 인물로 보고 최초의 민족 시조로 존숭하여 국민의식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하륜(河崙)은 “단군을 기자묘에 합사해야 한다”고 했고 조정은 받아들였다. 세종 때 변계량(卞季良)은 단군 존숭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여 삼국의 시조로서 단군의 위상을 정립하고 천자만이 행하는 제천의식을 부활시키기도 했다. 종합하면 단군신화는 몽골의 지배 하에서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을 중심으로 반고려(反高麗) 정치이데올로기로서 정립되어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단군신화가 민간 전승의 신화라고 한다면 그 근원을 시베리아―만주―한반도에 이르는 보편적인 신화나 설화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환웅과 곰(웅녀)의 결합은 인간과 동물의 교합(交合)이라는 수조신화(獸祖神話)로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고대관념이었다. 물론 수조신화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지만 곰을 조상으로 보는 건국 또는 시조 신화는 시베리아에서 만주를 거쳐 한반도까지 분포돼 있다. 중국 본토와는 거리가 있다.



다만 웅녀(熊女: 곰)에 대한 관념의 변이는 민족 이동 및 정치사회적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컨대 시베리아에 가까울수록 곰의 중요성이 커져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남부(예를 들면, 한국 공주지역)로 내려갈수록 곰의 위상이 추락해 결국은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존재가 된다. 단군신화에서 웅녀는 환웅의 역할을 지원하는 조연으로 나타나 정치적으로 환웅족에 의해 웅녀족(곰토템족)이 복속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신화 전문가인 서울대 조현설 교수는 “신화도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정치세력에 의해 보존되고 유지될 수 있을 때 지켜진다”고 한다.



고대 한국인의 ‘곰 숭배’는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에서 보이는 ‘대금(大金)’이라는 말은 큰곰, 대칸(큰 임금)을 의미하고 용비어천가에서도 광개토대왕비를 대금비(大金碑)라 한다. 한글 연구가 발달한 북한에서는 일찌감치 ‘곰’이 ‘임금’의 ‘금’과 어원이 같은 말로 파악한다. 즉 한국어에서 최고의 존칭으로 사용된 말인 ‘님곰’, ‘왕검(王儉)’, ‘니사금(尼師今)’, ‘대금’, ‘한곰’, ‘임금’ 등은 모두 ‘곰’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단군신화에 보이는 ‘궁홀산(弓忽山)’에서 ‘궁홀’이 바로 ‘곰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양서에 나타나는 백제 수도의 옛말인 고마성(固痲城)(梁書 諸夷傳),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개모성(盖牟城)’과 마한 55국 가운데 하나인 건마국(乾馬國)도 곰을 한자식으로 나타낸 말이라고 한다. 곰과 관련된 지명은 만주와 한반도 곳곳에 산재해 있다.



시야를 넓혀, 곰 숭배 원형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경우는 아무르강의 울치족·나나이족이다. 울치족은 어린 곰을 기르다가 자라면 활로 죽여 그 고기로 잔치를 벌인다. 자신의 조상인 곰이 죽으면서 자신의 살을 후손들에게 먹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울치족과 동계인 나나이족은 아무르강 유역에 많은 암각화를 남겼는데 이것은 한반도 남단 울주의 암각화와 유사하여 관련 전문가인 부경대 강인욱 교수와 한국전통문화학교 정석배 교수는 이들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만주어에서 마파(mafa)라는 말은 ‘할아버지’라는 뜻으로, 이것은 시베리아와 만주 등의 언어에서만 발견되는데 모두 ‘할아버지’ 또는 ‘곰(熊)’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곰을 조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다. 언어학자 정호완(대구대)은 어머니도 ‘곰’에서 나왔다고 한다[‘곰→홈→옴→옴마(엄마)’]. 알타이어 학자 람스테트(Ramstedt)도 무성파열음 기역(ㄱ)의 변이를 ‘ㄱ→ㅎ→ㅇ’으로 풀이하였다. 정호완 대구대 교수는 조선시대의 한자 학습 입문서인 신증유합(新增類合, 1576)에서 경(敬), 건(虔), 흠(欽) 등의 훈을 ‘고마’로 하여 고마(곰)가 경건하게 숭배하고 흠모해야 할 대상임을 보여 주는 보기들을 지적하였다.



결국 단군신화는 13세기에 잡기류(雜記類)인 삼국유사와 시문집(詩文集)인 제왕운기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공식적으로는 그 어떤 실체도 파악되지 않는 반고려·반원 세력의 정치적 민중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다. 그 이전에 한국사의 주체들(고구려·백제·신라)이 단군과 관련해 자신들의 역사를 서술한 증거들은 없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의 내용은 설화 수준으로 역사적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단군신화가 민중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민간에는 단군신화와 유사한 신화나 설화가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단군신화는 시베리아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곰 숭배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이고 그 변이과정을 통해 민족의 분화와 융합을 추적해낼 수 있다.



중앙SUNDAY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