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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末~문혁은 삼국지보다 극적, 한국인 머릿속엔 공백”

중앙SUNDAY의 인기 연재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가 200회를 넘었다. 혁명과 전란으로 점철된 격동의 중국 근현대사를 알기 쉽게 풀어낸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진귀한 사진들은 근 4년 동안 한결같이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 잡아왔다. 필자 김명호 교수(성공회대사진)는 30여 년간 중국 근현대사의 문헌 자료와 영상 자료를 천착해 온 중국 전문가다. 공개적인 인터뷰를 꺼리는 김 교수를 ‘연재 200회 기념’이란 명목으로 설득하여 그의 중국관과 중국 공부 편력에 대해 물어보았다.


-연재를 시작할 때 200회를 넘기겠다는 생각이 있었나.
“처음부터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처음 원고 청탁을 받을 때에는 국내에 잘 알려진 사람의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를 써 달라는 부탁이 있었지만, 내가 그걸 무시했다.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중국에는 중요한 사람, 무궁무진한 스토리를 가진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가령 딩충(丁聰·정총)이란 시사만화가가 그런 사람이다. 국내 어느 매체에 ‘중국은 시사만화의 역사가 짧음에도 불구하고 딩충이 숨지자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 주석이 조문할 정도로 대접을 받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는 내용의 글이 실렸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딩충은 단순한 만화가가 아니라 중국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지식인이었다. 루쉰(魯迅·노신) 작품에 삽화를 그렸고 당대의 중국 지도자들과도 교분이 깊었던 사람이다. 후진타오가 만화가를 대접해서 조문한 게 아니다.”

-중국 사람들도 잘 모를 법한 인물들의 개인사나 세세한 스토리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독자들이 많다. 어떻게 그런 내용들을 알 수 있게 됐는지 궁금하다.
“1980년대 한 사립대학에서 근무하던 무렵, 나는 매주 금요일이면 홍콩행 또는 타이베이행 비행기를 탔다. 도착하면 일주일 동안 밀린 중국·홍콩·대만 신문과 잡지를 깡그리 다 훑어보았다.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니 최신 소식을 알자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7∼8년을 그렇게 하니 대충 중국 사정을 알겠더라. 지금도 잘 모르는 게 나오면 직접 중국에 가서 자료를 찾는다. 내가 쓰는 얘기는 모두 기록 속에 있다. 주요 인물들이 남긴 일기집, 서한집, 회고록 같은 1차 자료를 읽어보면 된다. 가령 후쓰(胡適·호적)의 일기만 해도 8권 분량으로 나와 있다. 그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펑위샹(馮玉祥·풍옥상)과 정샤오쉬(鄭孝胥·정효서) 등도 일기를 남겼다. 이를 날짜별로 서로 맞춰가며 읽어보면 당시 사건들의 전체적인 윤곽과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들은 혁명의 와중에도 꼭 일기를 썼다. 편지를 보낼 때도 꼭 두 통씩을 써서 한 통은 보내고 한 통은 본인이 보관해두곤 했다.”

-중국 사람들이 기록을 대단히 중시하는 민족이란 얘긴데.
“그렇다. 송나라 때 이미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지구상의 모든 출판량보다 더 많다. 20세기 초를 봐도 상하이의 상무인서관 한 군데에서 펴낸 출판물이 미국 전체의 양보다 더 많다.”







-매회 연재마다 역동의 중국 근대사를 생생히 증언해 주는 사진들이 나오는데, 과연 이런 사진들을 다 어디서 구했을까 감탄하는 독자들이 많다.
“80년대 홍콩에서 출판 관련 일을 할 때다. 당시 편집자들이 단골로 삼는 골동품상이 하나 있었다. 옛날 자료 사진을 책에 실어야 하는데 출판사가 소장한 사진 가운데 마땅한 게 없으면 그 골동품상에 가서 구해오곤 했다. 어느 날 내가 직접 가 봤더니 정말 옛날 사진의 보고였다. 수천 장 수만 장의 사진들이 쌓여 있는데, 외국 특파원들도 그곳에 와서 필요한 사진을 사가곤 하더라. 물론 사진 값은 꽤 비쌌다. 그때부터 관심 가는 사진을 틈틈이 구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진을 입수하는 경로도 점차 다양해졌다. 처음에는 인물 사진, 특히 여성 사진들을 많이 봤는데 관심 분야가 점점 넓어졌다. 한국전쟁에 관련된 사진들을 집중적으로 찾아본 적이 있는데 중국 측에서 촬영한 사진들은 지금도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게 많다. 옛날 사진 중에는 사진 설명이 없는 것도 많은데 사진 속의 인물이 누군지 일일이 자료를 찾아가며 확인하다 보면 저절로 공부가 된다. 얼굴 사진만 보고 이 사람이 누군지 다 맞힐 수 있을 정도가 되니 중국인들로부터 ‘당신 정말 한국 사람이 맞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중국을 천착하게 된 계기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데 72년 군대 가기 직전이었다. 명동 거리를 가는데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의 방중 소식을 담은 호외가 나왔다. 그 길로 서점에 가서 처음으로 중국책을 샀는데 그게 궈모뤄(郭沫若·곽말약)의 소설 ‘낙엽’이었다. 그전에 한문 공부는 조금 했었기 때문에 대충 대충 읽어낼 수 있었다.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중국 책을 끼고 살아왔다. 이제는 신문을 봐도 중국 지명·인명이 한국 인명·지명보다 더 익숙하다.”

-특히 20세기 전반기의 중국 역사에 흥미를 가진 이유는.
“청조 멸망에서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의 중국 역사는 삼국지보다도 더 훨씬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연속이다.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또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극적이며 비장한가. 가령 국가주석을 지낸 리셴녠(李先念·이선념)은 원래 관을 짜던 목수였다. 글자도 모르던 가장 밑바닥 계층 출신이다. 어느 날 고향에 북벌군이 진주해 오는 것을 보고 ‘이제는 (사람의 관이 아니라) 구시대의 관을 짜겠다’며 혁명에 가담해 나중에 주석에까지 올랐다.
요즘에는 개혁개방 이후, 특히 경제 특구 문제에 관심이 많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경제특구를 만든 것은 신문기자 한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당시 중국에서 홍콩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를 어느 기자가 취재해 기사를 실으려고 했지만 데스크가 막았다. 그는 지방의 당 서기에게 ‘매일 탈출하게 내버려두지 말고 우리가 홍콩 같은 도시를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얘기했다. 이 말을 들은 서기가 기자에게 보고서를 만들도록 하고 이를 덩샤오핑에게 전달한 것이 경제 특구의 출발점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매료된 인물은 누구인가.
“단연 장제스(蔣介石·장개석)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장제스와 중국인들의 뇌리에 박힌 장제스의 이미지 사이에는 차이가 좀 있는 것 같다. 나는 장제스란 인물을 보면서 진시황, 수양제를 떠올린다. 진시황은 잘 알다시피 처음으로 중국대륙을 통일한 사람이다. 그 당시 중국인들의 머릿속에 통일이란 개념조차 없을 때였다. 춘추전국의 혼란기를 통일시켰지만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이 몰락하고 말았다. 그 다음에 들어선 한나라가 중화문명의 틀을 닦았다. 다시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했지만 그 여진을 못 견디고 몰락했다. 수나라를 이은 당나라에 와서 다시 한번 중화문명이 꽃을 피웠다. 장제스도 그런 것 같다. 청나라가 멸망한 뒤 군벌 할거의 시대를 통일한 것은 누가 뭐래도 장제스의 힘이다. 그 후 10년이 20세기 중국의 황금기였다. 중공업의 기초를 닦고 도시계획을 세운 것은 모두 다 그 무렵 이뤄졌다. 이런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항일전쟁과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혁명이 가능했다. 중국 역사란 것은 한 축에 진시황-수양제-장제스가 있고, 또 다른 한 축에 한무제-당태종-마오쩌둥이 있다고 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진시황과 수양제가 나쁜 면만 강조되는데 장제스도 마찬가지다. 가장 비극적인 영웅이다.”

-연재를 보면 중국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우리가 중국을 잘 아는 듯하면서도 실제론 아는 게 정말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 그럴까.
“지금처럼 대국으로 거듭난 중국이 그냥 이뤄진 게 아니다. 하지만 근대에서 개혁·개방 이전까지의 중국은 한국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공백이나 마찬가지다. 잘못된 시발점은 일제시대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이 각급 학교에서 적국인 중국을 비난하는 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중국인은 무식하고 지저분하고 머리에 든 것 없이 돈만 밝힌다는 식의 고정관념이 그때부터 생긴 것이다. 나는 중국을 볼 때 애정을 갖고 가급적 좋은 면만 보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중국과 중국 역사와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생겨나더라. 나라뿐만 아니라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 아닌가.”

-중국인이 잇속에 밝은 것은 사실이 아닌가.
“중국인이 돈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돈만 밝힌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다.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쓴 뒤 ‘궁형(宮刑)의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은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친구에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돈을 내면 형을 면할 수도 있었는데 가산이 없어서 그렇게 못했다’는 구절인데 당시 중국 제도로는 돈으로 형을 대신할 수 있었다. 사마천의 편지는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읽고 배우는데 여기에 ‘돈=목숨’이란 구절이 나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다. 이게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란 건 허구다. 그런 난센스가 없다. 전 세계에서 사유재산 제도가 가장 먼저 정착된 것도 중국이다.”

-중앙SUNDAY 연재 이전에도 글을 많이 썼었나.
“본격적으로 글을 써본 건 중앙SUNDAY 연재가 처음이다. 처음 시작할 땐 종이에 쓴 걸 딸이 컴퓨터로 타자를 쳐서 송고했다. 요즘은 내가 느리긴 하지만 직접 타자를 친다. 연재 덕분에 컴퓨터도 배우게 됐다. 한번 써놓고 여러 차례 고치고 또 고친다. 시인이기도 했던 마오쩌둥이 ‘글은 고칠수록 좋아진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생각해보니 여자의 화장과 요리는 고칠수록 나빠지지만 글은 마오쩌둥이 말한 대로다.”


예영준 기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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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