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01) “중국화의 천박함 절정”


▲1928년 가을, 베이핑(北平)예술학원 원장에 취임하기 직전의 쉬베이훙. 장비웨이가 장남 보양(伯陽)을 안고 있다. 김명호 제공

1917년 5월, 장비웨이를 데리고 도쿄에 도착한 쉬베이훙은 신주쿠에 숙소를 정했다. 수중에 창힐(蒼<9821>)의 초상화 값으로 받은 1600원과 캉유웨이가 준 400원이 있었다. 적은 돈이 아니었다. 집 주변에 서점과 고서방들이 많았다. 러시아와 서구의 미술서적들이 널려 있었다. 쉬베이훙은 화랑·미술관·책방에서 날을 지새웠다.

장비웨이가 보기에 쉬베이훙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취향이 나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뭘 생각하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혼 빠진 사람처럼 앉아 있다가 후다닥 튀어 나가곤 했다. 일본말도 못하는 사람이 매일 비싼 그림책과 고서화들만 한 보따리씩 싸 들고 들어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가사키 카스테라와 미루쿠 가라메루는 사주지도 않았다. 툭하면 의자에 앉혀놓고 그림만 그려댔다.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예술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당시에는 몰랐다.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주제에 뭐 그리 대단한 걸 알랴 싶었다. 그때 내 나이 스물 한 살, 너무 어렸다. 소녀에서 여인으로 변한 것 외에는 아무 소득이 없었다.” 두 사람은 6개월 만에 돈이 바닥났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워낙 대형사고를 치고 떠난 도시이다 보니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캉유웨이가 베이징대 총장 차이위안페이(蔡元培)를 찾아가라며 소개장을 써줬다. 교내에 화법연구회(畵法硏究會)를 신설하고 적당한 사람을 수소문하던 차이는 쉬베이훙을 초빙했다. 장비웨이에게도 꽁뜨(孔德)학교 음악교사 자리를 마련해줬다. 프랑스에서 두부장수를 하다 돌아온 국민당 원로 리스쩡(李石曾)이 세운 학교였다. 쉬베이훙과 장비웨이는 이때부터 균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로 노는 동네가 달랐다.







23세에 중국 최고학부의 교수가 된 쉬베이훙은 민주와 과학을 제창하던 후스(胡適), 천두슈(陳獨秀) 등과 어울리며 신문화 운동의 주류에 합세했다. 베이징대에서 발간한 회학잡지(繪學雜誌) 창간호에 중국화개량론(中國畵改良論)을 발표해 보수적인 북방화단을 한바탕 뒤집어 놓았다. “중국화의 천박함이 절정에 이르렀다. 옛것을 지켜야 한다며 독립적 지위를 상실한 결과다. 옛것들 중에 좋은 것은 지키고, 다 죽어가는 것들은 살리고, 신통치 않은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채워서 서구의 회화와 융합해볼 필요가 있다.” 쌍수를 들어 맞는 말이라고 하는 사람보다는 말 같지 않은 소리라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쉬베이훙은 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유럽항로 재개를 손꼽아 기다렸다. 중국 고대회화와 서구미술을 한번 뒤섞어 보려면 그쪽으로 가는 길밖에 없었다.

베이징 생활 1년이 지날 무렵 유럽전선에 포성이 그쳤다. 교육총장 푸쩡상(傅增湘·대 수장가이며 목록학과 판본학의 대가였다. 쉬베이훙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봤다고 한다. 편견과 오만함을 끝까지 고수하라고 충고했다)과 차이위안페이가 쉬베이훙을 출국시키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공비(公費) 유학생 자격을 취득한 쉬베이훙은 1919년 3월 20일 장비웨이와 함께 프랑스로 떠났다. 신문화 운동의 정점인 5·4운동 전야였다. 중도에 대영박물관의 전시실에서 넋을 잃었고, 희랍의 파르테논 신전 앞에 섰을 때는 중국 고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들의 고사가 떠올랐다. 10년 후 베이핑예술학원(베이징 미술학원의 전신) 원장에 취임하는 날까지 계속된 유랑의 시작이었다. 장비웨이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계속>


김명호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