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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타계] 인간의 허위와 속물근성 낱낱이 까발린 ‘영원한 현역’




가톨릭 신자였던 박완서 작가에게 글쓰기와 신앙은 동일한 구도행위였다. 박씨는 삶의 고통을 창작의 에너지로 승화시켰다. 22일 고인의 빈소에서 연도(煉禱·위령기도)를 하고 있는 수녀들. [최정동 기자]


22일 타계한 소설가 박완서씨는 영원한 현역이었다. 1970년 불혹의 나이로 늦깎이 등단한 후 한국의 어떤 작가보다 정력적으로 소설을 써냈다. 지난 40년간 책을 내지 않은 해가 없다시피 했다.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대중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예민하면서도 신랄한 시선, 현미경 같은 촘촘한 묘사로 실감나게 복원해내는 시대와 개인의 비극에 독자들은 울고 웃었다. 한국문학의 빛나는 성좌, 문단의 거목(巨木)으로 불리는 이유다. “한국 문학사의 맥락과 연대표를 갱신하는 업적을 이룬”(문학평론가 이경호) 문단의 큰 어른이었다.

 문학에 대한 애정이 강렬해서였을까. 그는 담낭암이라는 무서운 병마도 이겨내는 듯 했다. 지난해 9월 발병해 10월 초순에 수술을 받은 후 경과가 좋아 경기도 구리시 아치울 마을 자택과 서울 일원동 삼성의료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투병 중에도 문예지 문학동네의 젊은 작가상 심사를 맡아 병상에서 후보작들을 읽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이 공교롭게도 심사일이었다. 심사장소에 나갈 수 없었던 그는 미리 e-메일을 보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문학상 심사에 참여한 것이다. 그런 그도 끝내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진 못했다. 22일 새벽 갑작스런 호흡 곤란에 이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졌다.

 도도한 강물 같은 그의 문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6·25 전쟁체험이 바탕이 된 것들이다. ‘복수(復讐)로서의 글쓰기’로 표현되는 작품들이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모와 만행을 견디어내야 했다. 그때마다 그 상황을 견디어낼 수 있는 힘이 된 것은 언젠가는 이걸 글로 쓰리라는 증언의 욕구 때문이었다. 도저히 인간 같지도 않은 자 앞에서 벌레처럼 기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오냐, 언젠가는 내가 벌레가 아니라, 네가 벌레라는 걸 밝혀줄 테다.”

 생전 그가 한 글에서 밝혔던 소설을 쓰게 된 이유다. 어떻게 해서도 잊혀지지 않는 참혹한 전쟁체험, 이를 언젠가는 까발리겠다는 앙심(怏心)이 소설 쓰는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고인은 1931년 지금은 북한땅인 경기도 개풍군 박적골에서 태어났다.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던 해 한국전쟁이 터진다.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올케와 함께 북으로 끌려가던 그는 “임진강은 절대로 건너선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고는 극적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생쌀을 씹고 폭격을 피하며 돌아온 서울은 처참했다. 오빠가 좌익활동을 한 죄로 전쟁의 주도권이 바뀔 때마다 남북 양측으로부터 번갈아 수모를 겪었다. 오빠는 끝내 사망한다.

 전쟁체험은 그를 문학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이었다. 오빠를 잃은 상실감, 아들을 먼저 보낸 참척(慘慽)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어머니를 고스란히 지켜본 경험이 그의 자양분이자 수원지인 것이다. 전형적인 ‘억척어멈’이었던 어머니를 소재로 한 ‘엄마의 말뚝’ 연작, 화가 박수근이 등장하는 등단작 ‘나목’ 등이 대표적이다. 연작 형식의 자전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도 한국전쟁의 비중은 상당하다.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음화(陰畵)인 셈이다.

 그는 88년 교통사고로 생때같던 막내 외아들을 잃는다. 서울대 의대를 다니던 잘생긴 아들이었다. 자신의 어머니에 이은 ‘대를 잇는 참척’이었다. 이런 기구한 경험은 단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일기 형식의 소설집 『한 말씀만 하소서』 등으로 나타난다. 모성(母性) 모티프의 변주다.

 나머지 한 갈래는 보다 대중을 겨냥한 세태소설이다. 신문 연재소설 『휘청거리는 오후』가 대표적이다. 결혼 적령기의 여성이 마담 뚜를 통해 부유하지만 아이 둘 딸린 50대 남성과 결혼하는 얘기다. 돈이 우선인 세태,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통렬히 비판했다. 이럴 때 작가의 시선은 야멸차고 냉정하다. “당돌함과 솔직함으로 세상의 허위와 우리 안의 속물적 욕망을 머뭇거림 없이 정면으로 까발기는”(평론가 황도경)특유의 면모다. 평론가 김수이는 독자들이 그런 박완서 소설을 읽을 때 “피학적이며 가학적인 쾌감에 전율하게 된다”고 평하기도 했다.

 22일 빈소를 찾은 평론가 김화영씨는 “선생의 글쓰기는 마치 호미 같다”고 평했다. “모난 곳 없이 둥굴둥글 하면서도 내리찍을 때는 가차 없다”는 것이다. ‘사납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신랄한 시선을 통해 삶의 진상을 온전히 드러내려는 글쓰기. 흉하고 쓰디쓴 인간의 본성, 삶의 알맹이를 드러내는 글쓰기 방법론이다.

 그가 80년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섰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한국작가회의)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다는 사실은 꽤 알려진 얘기다. 이시영 시인은 “작가회의가 어려울 때마다 박완서 선생이 수백 만원씩 도와주는 바람에 버틸 수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이씨는 또 “85년 출판사 창비가 정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자 되살려 내라며 지식인 2853명이 서명한 문서를 박완서 선생이 소설가 황순원·이호철씨 등과 함께 당시 문화공보부에 갖다 냈다”고 했다.

 박씨는 한국전쟁에 의해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거덜나 이념 싸움이라면 누구보다도 넌더리를 냈다. 그런 만큼 균형감각을 가지고 현실과 사회를 고민했다. 평론가 김화영씨는 “고인은 좌도 아닌 우도 아닌 중간에 섰던 분이셨다. 우리 문단에 이런 분이 다시 없다”고 애도했다.

 고인은 황순원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만해문학상, 인촌상, 호암예술상, 보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93년부터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했고 2004년 예술원 회원이 됐다. 2006년 문화계 인사로는 처음으로 서울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발인은 25일 오전 8시 40분. 장지는 용인 천주교 묘지다. 유족으로 장녀 호원숙(작가), 차녀 원순, 삼녀 원경(서울대 의대 교수), 사녀 원균 씨 등 4녀와 사위 황창윤(신라대 교수), 김광하(도이상사 대표), 권오정(성균관대 의대 학장), 김장섭(대구대 교수)씨 등이 있다. 02-3410-6916.

글=신준봉 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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