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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56) 이승만의 이상한 침묵



경무대 길 막은 휴전 반대 시위대 급한 마음에 차에서 내려 호소했다
“백선엽입니다, 대통령 뵈러 갑니다” 함성 소리와 함께 길이 열렸다

1953년 6월 초 판문점에서 유엔과 공산 측 휴전회담이 급속히 펼쳐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서울 등에서는 휴전에 반대하는 한국인들의 시위가 그치지 않았다. 중앙청 인근의 옛내자호텔 앞으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여학생들이 태극기를 어루만지며 눈물로 휴전에 반대하는 모습이다. 라이프지에 실린 사진이다.


마크 클라크 유엔총사령관은 내가 미국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급한 전화 한 통을 받고 귀국하기 직전인 1953년 5월 말 워싱턴으로부터 아주 중요한 훈령(訓令)을 받아들었다. 주한 미국 대사관에도 같은 내용의 훈령이 전해졌다. 그 내용은 한국과 미국의 상호방위조약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 테면 “필리핀과 태평양 안전보장조약기구(ANZUS) 사이에 맺은 방위조약의 형식에 따라 미국과 한국의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할 예정이며, 이런 미국 정부의 뜻을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하라”는 내용이었다.

 53년 6월 초의 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의 긴급 호출을 받고 나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장에는 미군 장교가 영접을 나와 있었고, 나는 그를 따라 도쿄 시내의 어느 한 호텔로 향했다.

 나는 당시에 클라크 장군이 워싱턴으로부터 한국과 미국의 상호방위조약에 관한 훈령을 받았는지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귀국하는 길에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하네다 공항에 도착해 도쿄에서 하루를 묵는 김에 유엔군총사령부를 찾아가 클라크 장군을 예방한 자리였다.

 그는 “미국 방문이 즐거웠느냐”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고, 나 또한 “미군들의 환대로 여행이 매우 순조로웠다”면서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항을 일절 묻지 않았다. 그는 유엔군총사령관으로서 워싱턴에서 내가 움직였던 동선(動線)을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지만, 내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에 대해 관심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나 또한 그에게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관해 나눴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직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은 사항을 미군 지휘관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의 클라크 장군은 한국과 미국의 상호방위조약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방식을 모색 중이었고, 나는 그렇게 맞이한 전기(轉機)가 앞으로의 휴전회담에서 어떤 효과로 나타날지에 대한 생각에 깊이 빠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까닭에 클라크 장군과 나는 의례적인 인사만을 나눈 뒤 헤어졌다. 이튿날 나는 미 공군이 제공한 C-47 수송기에 몸을 싣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여의도 비행장에는 로저스 미 군사고문단장 등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들은 공항의 간이 휴게실인 콘세트 건물에서 내게 당시의 전선 상황 등을 브리핑했다. 그리고 나는 자동차 편으로 경무대를 향해 떠났다. 20일 정도 비웠던 서울이었다. 여의도 비행장을 떠나 시내로 점차 진입하면서 나는 강력하면서도 어딘가 낯설지 않은 열기(熱氣)를 느낄 수 있었다.

 시내의 사람들 분위기가 분주해 보였고, 얼굴이 꽤 상기된 표정으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역시 한국은 아직 전선(戰線)을 유지하는 나라였고, 그 전선 너머에는 결코 함부로 눈을 뗄 수 없는 침략적이면서 공격적인 공산군이 버티고 있는 나라였다. 거리는 아직 그런 공산군에 맞서 계속 싸우자는 휴전반대의 열기로 넘쳐나고 있었던 것이다.

 경무대 가는 길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특히 중앙청 앞 광장, 외신기자들이 묵고 있던 그 옆의 내자호텔 일대는 휴전을 반대하는 시민과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내가 탄 차량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귀국 인사에다가 미국에서 있었던 일을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마음이 급해졌다. 군중 틈을 뚫고 경무대로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중공군을 한국 땅에서 몰아내자”는 식의 구호를 힘껏 외치고 있었으며, 그 열기는 아주 대단한 편이었다. 사람들은 격렬한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에 학교 이름이나 직장 이름을 함께 적었다. 그런 점 때문에 관제(官制) 데모의 면모가 보이기는 했으나 당시 일반적인 한국인의 정서는 ‘휴전 반대’임이 분명했다.

 광화문 앞 광장이 그런 열기와 함성으로 가득 달아올랐다. 내 차는 군중 속에 완전히 갇힌 상태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도저히 나갈 수 없으니, 시민들에게 한번 호소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차에서 내렸다.

 나는 “육군참모총장 백선엽입니다. 지금 경무대로 대통령을 뵈러 가는 길입니다. 길을 좀 터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차량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처음에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어 한두 사람이 박수를 치더니 곧 시위대 모두가 힘찬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몇 사람이 나서더니 시위대 사이로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열심히 군중 사이로 좁은 틈을 용케 만들었고, 나는 차에 올라타서 조금씩 앞으로 빠져나갔다.

 53년의 초여름을 맞는 경무대는 여전한 모습이었다. 적 항공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설치한 위장 그물망이 걸쳐져 있었고, 주변은 적막하기만 했다. 나는 경무대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나는 대통령에게 방미 일정을 잘 마쳤다는 인사와 함께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과 나눴던 이야기를 보고했다. 나는 아이젠하워와의 대화 내용을 더 상세히 보고할 참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먼저 보고의 줄거리를 듣고 난 뒤에는 “알았네. 이제 가보게”라고 말했다.

 조금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의 지대한 관심사였던 한국과 미국의 상호방위조약에 관한 내용이었음에도 이 대통령은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어쩌면 내가 그런 내용을 보고하기 전에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대통령은 그 상호방위조약 다음의 상황에 나서기 위한 깊은 수(手) 읽기에 들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초여름의 싱그러움이 다가와 있었지만 그때의 경무대는 대통령의 깊은 침묵으로 무거운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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